안상훈
서울대 교수ㆍ사회정책학
2012년의 총선과 대선을 거치면서, 한국 사회의 정치 지형은 복지국가에 관한 논쟁을 중심으로 급격하게 재편되었다. ‘무상급식 불가론’이라는 단말마(斷末魔)의 비명을 뒤로 한 채, 우리사회의 주류정치가 ‘복지확대론’을 중심으로 재구성된 것이다. ‘한국형 복지국가론’을 앞세운 박근혜 진영의 인식전환이 대선가도의 교두보를 마련하였고, 여야 주자들의 복지공약이 비슷해지는 초유의 상황이 전개되었다. 성장우선론에 관한 집단최면의 헤게모니가 사그라지면서 두 번째 한강의 기적은 복지와 함께 해야 한다는 새로운 발전전략이 잉태된 것이다.
대선결과에 대한 희비가 엇갈린 지 달포가 지나면서 박근혜 복지공약의 실현의지나 가능성에 관한 우려와 기대가 교차하고 있다. 선거 와중에 자취를 감췄던 보수일각의 복지 경계론이 고개를 드는가하면, 당선인의 공약실천 의지에 관한 진보진영의 의심 또한 끊이질 않는다. 그 의도가 하늘과 땅 차이임은 분명해 보이지만, 보수와 진보의 딴죽 걸기가 복지공약의 공약화(空約化)로 모아지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어제의 압축 성장을 닮아서일까? 오늘의 복지 또한 압축적으로 전개되고 있기에, 복지정치의 전개과정에 관한 전문적 관전평 없이는 관중의 이해가 요원한 상황이다.
‘국가진화론’으로 통칭할 수 있는 고전적인 이론에 따르면 모든 국가는 일정한 진화과정을 통해 4단계의 변화를 겪게 된다고 하며 그 첫 단추는 ‘정복국가’에서 꿰어진다. 갓 태동한 국가는 주변국과의 정복전쟁을 통해 영토를 넓혀가면서 주권이 미치는 판도의 확장에 매진하게 되는데, 이 단계의 국가에서는 전쟁수행능력과 결부된 강력한 통치력만이 지도자의 절대덕목으로 추앙된다. 전쟁 상황 아래의 민초들에게 중요한 것이 자신들의 목숨을 지켜줄 강력한 통치력 외에 무엇이 있겠는가?
전쟁이 끝나고 평화의 시기가 도래하면 지도자에게 기대하는 국민들의 덕목 또한 바뀌게 된다. 생사의 문제가 일단락되는 순간, 인간의 본성에 속하는 ‘욕구상승의 법칙’이 작용하면서 잘 먹고 잘 사는 문제가 중요해지기 때문이다. 국가진화의 두 번째 단계인 ‘발전국가’를 목도하게 되는 찰나이다. 발전국가의 국민들은 경제를 일으켜서 풍요로움을 선사해줄 지도력을 갈구하며, 풍요의 리더십만 보장된다면 정치적 민주주의를 주저 없이 포기한다. 한편, 발전국가의 지도자가 경제적인 성공신화를 작성하지 못할 경우에는 봉기에 의한 체제붕괴에 직면하는 일이 다반사로 벌어진다.
경제적 풍요가 이뤄지고 국민들의 교육수준이 높아지게 되면 발전국가형 ‘민주정치의 부재상황’도 마침내 종언을 고하고 만다. 국민의식이 높아지고 권리의식이 증진되면서 ‘민주국가’로의 진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단순한 부의 향유를 넘어선, 보다 근본적인 자유를 향한 욕구의 증진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다수결이 지배하는 정치의 민주화가 일정한 궤도에 오르게 되면 경제적 약자가 중심에 서는 새로운 정치가 시작된다. 경제적 서민이 다중일 수밖에 없는 것이 자본주의의 필연이라면, 1인1표제의 민주정치 아래에서 서민대표를 자임해야 하는 것은 성공적인 정치인의 숙명이기 마련이다.
선거에서의 승리가 집권의 유일한 방편인 민주국가에서 대다수 서민의 ‘한 표’가 중요해지면 ‘복지국가’를 향한 최후의 진화가 촉발된다. 국민행복을 위한 삶의 기본적 요소들이 ‘시민권’의 내용에 속속 더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한국정치가 당면하고 있는 ‘낯선 상황’의 실체일 테지만, 우리보다 앞서간 모든 나라들이 겪었던 ‘익숙한 과정’이기도 하다.
처음 보는 일에 대한 당혹이나 의심이 인지상정이라면 한국형 복지공약에 대한 우려나 요구는 자연스런 성장통에 불과하다. 뒤쳐진 복지를 합리적으로 벌충하라는 시대정신을 지켜내기 위해서라도 신뢰라는 이름의 사회적 자본을 향해 힘을 모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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