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북한 폰트의 유행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북한 폰트의 유행

입력
2013.01.24 12:06
0 0

유지원

홍익대 BK21 메타디자인 연구교수

신라 시대를 배경으로 한 사극이 인기리에 방영된 적 있었다. 인쇄가 발명되기도 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컴퓨터로 출력한 한자 폰트가 등장인물들의 일상에 버젓이 나타나곤 했다. 글자체를 전문적으로 고를 때는 조형적 가치뿐 아니라 역사적, 사회적, 기술적, 개념적 맥락을 고려해야 한다. 이 맥락이 어긋나면 아무리 조형적 완성도가 높아도 이처럼 우스꽝스럽고 거슬리게 된다.

또한 폰트는 텍스트의 내용에 시각적 ‘말투’를 입힌다. 어떤 폰트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글의 뉘앙스가 불가피하게 달라진다. 일례로 일본의 표지판에서는 고딕체가 두드러지게 둥그스름하다. 폰트 디자인의 세계적 권위자인 아키라 고바야시에 의하면, 이는 우선 일본인이 편하게 여기는 필법과 관련이 있고, 또 일본인 특유의 공손한 말투와 관련이 있다고 한다.

지난 주, 18대 대선 수 개표 실시를 요구하는 플래카드의 북한 폰트를 둘러싼 논쟁이 있었다. 문제의 플래카드를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는 상황이라, 뚜렷한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선택했는지, 조형적으로 적절해 보여서 선택했는지, 혹은 최근 복고적 한글 폰트의 유행을 따라 쉽게 구할 수 있게 된 북한 폰트를 맥락없이 무분별하게 선택했는지, 이 특정 사안에 대해서는 단정하기 어렵다.

다만, 북한 폰트가 유행하게 된 일반적인 원인은 짚고 넘어갈 수 있겠다. 사실 한국 그래픽디자인계에서 이 이슈는 한풀 꺾이다 못해 다소 식상하기까지 해졌다. 한국의 주요 폰트들은 대체로 섬세하고 단정하게 다듬어지는 추세로 디자인되어온 반면, 북한 폰트들은 조형적인 측면에서만 보았을 때 투박한 외관이 주는 거친 그래픽적 힘이 강하고, 시선을 잡는 선동력이 있다. 대개 점잖고 부드러운 한국 폰트에 비해, 북한 폰트는 ‘말투’가 세다. 묘하게 어눌하고 이질적인 말투를 가졌다. 한국 폰트들에는 다양한 말투를 표현하고 소화해내기에 쓸만한 종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한국 디자이너들이 갈증을 느끼는 것이다. 이처럼 한국의 한글 폰트에 다양성이 부족한 원인을 더 근본적으로 거슬러가 보면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라틴알파벳(로마자)에 비해 폰트 디자이너가 현저하게 적다. 라틴알파벳은 글자의 역사도 훨씬 오래되고, 영어, 프랑스어 등 대부분의 유럽어를 비롯하여, 터키어, 인도네시아어에 이르기까지 여러 언어권에서 사용되고 있으며, 사용 인구도 전세계적으로 한글과 비교도 안 될 만큼 많다. 그만큼 풍부한 수요와 공급이 있는 것이다. 한국어와 한글 역시 이처럼 다양한 문화적 환경에 처했다면, 한글 폰트들도 더 다채로운 양태로 움트지 않았을까? 네덜란드 작가 세스 노터봄은 ‘나는 아득히 서쪽에서 바람을 타고 실려와 낡은 언어에 싱그러운 숨결을 불어넣는 문학이 있어서라도 스페인어가 부럽다.’고 했다. 네덜란드 문학은 네덜란드 본토에만 고여있는 데 반해, 스페인어권 문학에는 남미 문학이 활력을 넣어주는 점을 부러워하고 있는 것이다. 한글 자체는 훌륭한 문자이지만, 의식 있는 몇몇 폰트 디자이너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한글 폰트 디자인 풍경은 전반적으로 단조롭다. 노터봄처럼 가끔 이 점이 아쉽다.

둘째, 한국 사회에서는 한글 폰트 디자인의 노동가치에 대한 경제적 보상과 일반의 사회적 인식이 현저히 낮다. 수많은 글자들을 우직하게 디자인하여 쓸만한 폰트를 만들어내려면 좋은 교육을 받은 인력들이 훈련과 연구, 절대시간을 쏟아부어야 한다. 폰트 디자인의 지적, 콘텐츠적 가치에 대한 올바른 사회적 인식이 부족한 점은 헌신을 각오한 한글 폰트 디자이너들의 활동을 위축시킨다. 금전적 보상뿐 아니라 심리적 보람조차 부족하다. 이에 디자이너와 디자인 교육자들 스스로도 실질적 연구 투자비와 사회적 인식의 부족함에 문제의식을 느껴 ‘한글특별위원회’를 조직해서 자비를 들여가며 대책을 강구하는 중이다.

북한 폰트들은 이 척박함의 상황에서 유행을 형성하며 스며들었고 때로 무분별하게 적용되기도 한다. 한국어가 어떻게든 더 다양한 표정과 말투로 표현력 있게 시각화되고자 하는 현상이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