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오후 2시 서울 이화여대 캠퍼스 내 복합건물인 ECC 강의실. 수 백 명의 학생들이 모여 골머리를 앓는 모습이 역력했다. 사각거리는 펜 소리가 조용히 들리는 가운데 고개를 젖히고 명상에 잠기는가 하면 머리카락을 쥐어뜯는 학생도 보인다. 일부 학생들은 1시간도 채 되지 않아 고개를 저으며 A4용지 한 장만 덜렁 감독관에게 내고 조용히 자리를 떴다.
올해 2회째를 맞는 '이화인 독서대회'의 한 풍경이다.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박지원의 '열하일기' 김수정의 '나는 런던에서 사람 책을 읽는다'같은 역사, 철학, 사회과학, 문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선정한 서적 8권을 미리 읽고 3시간 내에 서평을 써 내야 하는 게 과제다. 손 글씨로 써야 하고 스마트폰ㆍ노트북 등 일체의 디지털 기기는 반입 금지다. 참가학생은 모두 326명. 심리학과 허모(20)양은 "평소 어떤 책을 읽어야 하는지, 책을 읽고 어떻게 생각을 정리해야 하는지 막막해서 대회 참가를 신청했다"고 말했다. 과학교육과 조모(21)양은 "서평을 써본 적이 거의 없다. 평소 트위터에 쓰는 것처럼 단문에 익숙해져 긴 문장을 차분히 쓰기도 어려웠다"고 말했다.
초ㆍ중ㆍ고교도 아닌 이른바 명문대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독서대회를 갖는 게 어울리지 않는 듯 하지만 이것도 요즘 대학생들의 실상이다. 독서대회 개최도 스마트폰은 놓지 않지만 책과 글쓰기는 멀어져 가는 학생들에게 '어떤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를 알려주기 위한 고육지책인 셈. 이 대회 기획에 참여한 김수경 이화여대 교양교육원 특임교수는 "지난해 2학기에 개설된 독서 세미나 수업을 해보니 학생들에게 책을 읽히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고, 읽고 난 느낌을 말하라고 하면 주눅이 들기 일쑤였다"고 말했다. 특히 한 반에 15명 남짓한 수업에서 2, 3명 정도는 중도 포기하더라는 것이다. '나는 런던에서 사람 책을 읽는다'를 택한 허씨는 "아무리 엉망이어도 내가 직접 생각한 내용을 쭉 써보니 나도 모르게 생각이 정리되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김경준기자 ultrakj75@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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