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雪山 낑낑 등반 씽씽 활강… 이것이 '원초적 스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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雪山 낑낑 등반 씽씽 활강… 이것이 '원초적 스키'다

입력
2013.01.23 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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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따르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스키는 스칸디나비아반도의 늪 속에서 발견됐다. 짜릿한 대회전과 활강을 즐기기 위해서는 아니었을 게다. 5,000년 전 북극권의 조상이 스키를 만든 까닭이.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사력을 다해야 하는 자연의 혹독함에 적응하기 위한 도구가 스키였을 텐데, 이제 문명의 이기로 자연을 깎아 낸 자리에서 스피드의 쾌락을 만끽하는 도구로 스키는 인식된다. 그러나 스키 리조트를 벗어난 자연에서 여전히 스키를 타는 사람들이 있다. 산악스키(Ski Mountaineering). 대자연의 품으로 들어가는 수단으로서의 스키를, 지금은 그렇게 부른다.

"원래 스키는 오르기 위해서 탄생했어요. 산악스키는 정확히 자신의 힘으로 올라간 만큼, 내려갈 때의 기쁨을 주는 정직한 스포츠입니다."

지난 18일 강원 평창군 대관령 발왕산 발치. 한 무리의 대학생들이 뒤우뚱거리며 언덕바지를 오르고 있다. 허벅지까지 쌓인 눈을 파헤치고 등반하는데 모두 스키를 신었다. "지그재그로 디뎌! 중심 잡고." 대한산악연맹 산악스키위원회 박경이(47) 이사의 새된 고함이 잦아진다. 현란한 컬러의 스키 고글을 쓰고 하얀 눈밭에서 되똑이는 학생들의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났다. 그런데 박 이사가 "얘들이 스키는 아직 서툴러도 암벽 등반 때 선등(선두에서 올라 길을 잡음)을 하는 애들"이라고 귀띔한다. 이들은 한국대학산악연맹에 소속된 대학생 클라이머들로, 1박2일로 진행된 산악스키 캠프에 참여 중이었다.

산악스키는 알피니즘(alpinism)의 일부다. 근대적 등반이 시작된 19세기 말부터 유럽의 고산 지대에서 스키는 산악인들의 필수품이었다. 히말라야처럼 만년설로 뒤덮인 곳이나 눈이 많은 지역으로 겨울 원정을 떠나보면, 등산화에 크램폰(빙설 지역을 등반할 때 접지력 확보를 위한 도구)만 매단 산악인보다 스키를 신은 산악인을 더 많이 볼 수 있다. 한국에서도 산악스키의 내력은 길다. 일제 시대부터 백두산과 금강산, 한라산 등을 스키로 오른 기록이 있다. 그러나 1970년대 스키 리조트들이 건설되면서 산악인들은 스키를 멀리했다. 스키가 인공적인 '다운힐(Down Hill)'만을 위한 스포츠로 인식됐기 때문이다.

"산악스키의 매력이요? 남들이 가지 않는, 가볼 생각도 하지 못하는 곳까지 자유롭게 갈 수 있다는 거죠. 쌓인 눈이 길이 돼 주니까."

TV광고에서 종종 보는 '헬리 스키(heli-skiing)'를 산악스키의 진수로 생각하기 쉽다. 헬리콥터에서 스키를 신고 낙하해 수천 미터를 단숨에 하강하는 스피드와 담력은, 그러나 산악스키의 본질과 거리가 멀다는 게 박 이사의 설명. 산악스키용 장비는 하강보다 등반에 초점을 맞춰 제작된다. 일반 알파인 스키와 가장 큰 차이점은 부츠의 뒤꿈치가 플레이트에서 떨어져 들린다는 점. 그래서 등반 시 발의 움직임이 자유롭다. 스키를 '들고' 걷는 게 아니라 '끌고' 걷는데, 눈 위를 미끄러져 움직이기 때문에 스피드나 체력 소모에 있어서 일반 등반보다 훨씬 유리하다. 눈 속에 빠지지 않고 크래바스(갈라진 틈)도 지날 수 있다. 요컨대 산악스키를 신으면 겨울 등반의 활동반경이 훨씬 넓어진다. 자연의 속살로 다가가는 거리가, 그만큼 짧아진다.

기본적인 등반법과 하강법을 가르치고 나자, 박 이사가 학생들에게 "실을 떼라"고 말했다. 하강하라는 지시다. 가장 보편적인 산악스키 장비는 알파인 투어링(Alpine Touring) 스키인데, 등반할 때는 접지력 확보를 위해 플레이트 바닥에다 한 쪽으로 털이 누운 직물(스킨)을 부착한다. 예전엔 물개 가죽을 많이 써서 스킨을 '실(seal)'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강 시에는 떨어졌던 부츠를 플레이트에 고정시켜 장비를 일반 스키처럼 만든다. 산악스키의 특이한 점은, 스키를 잘 타지 못해도 겨울 산행에 이용할 수 있다는 것. 등반용 도구로만 쓰고, 내려올 땐 그냥 배낭에 매달고 걸으면 된다.

"후우~웃!" 고요한 산 속에서 학생들의 환호가 커진다. 역시 등반으로 다져진 대학생들답다. 단 이틀의 교육으로 작지 않은 경사도의 언덕을 스키로 내려왔다. 뎅굴뎅굴 뒹굴기도 했다. 오를 때의 노력에 비하면 하강하는 즐거움은 무척 짧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학생들의 표정엔 아쉬움이 없었다. "산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스키는 내려올 때의 기쁨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르고 내리는 모든 과정에서 대자연과 호흡하기 위한 것"이라고 박 이사는 설명했다. 현재 국내에서 산악스키를 즐기는 인구는 500~1,000명 정도인 것으로 추정된다. 등산 인구에 비춰보면 턱없이 적은 숫자다. 산악스키를 즐길 만한 장소가 없기 때문은 아닐까. 박 이사의 대답은 이랬다.

"산림청과 협의해 겨울철엔 사실상 폐쇄되는 전국의 임도를 산악스키를 위한 공간으로 활용하려고 해요. 그렇게 된다면 스키를 신고 산을 즐기는 사람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날 겁니다."

산의 허리를 자르고 속을 파내는 스포츠라고 생각해 스키를 멀리해온 사람이 있을 것이다. 화석연료를 태워 움직이는 리프트를 타고 오르는 인공의 움직임 끝에, 천편일률로 계산된 인공의 스피드에 몸을 맡기는 행위가 자연과 한 걸음 더 멀어지는 행위라고 생각해온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산악스키 부츠에 발을 넣어볼 일이다. 스키를 신어야 다가갈 수 있는 자연이, 순백의 계절 속으로 펼쳐져 있다.

[여행 수첩] ●일반적으로 많이 쓰고 국제대회에서도 사용되는 산악스키용 장비는 알파인 투어링(AT) 스키다. 일반 스키에 비해 가볍고 두껍다. 가벼울수록 등반할 때는 편하지만 하강 시 안정감이 떨어진다. 등반하려는 산의 설질과 난이도, 자신의 실력에 맞춰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구입하는 것이 좋다. 국내에 수입판매처가 두세 곳 있다. 살로몬코리아 (02)508-8815 PSV컴퍼니 (02)3401-4723 ●산악스키를 배울 수 있는 기관은 대한산악연맹 산하 산악스키위원회가 거의 유일하다. 매년 1~2월 일반인 대상 강습을 연다. 강원 평창군 알펜시아리조트 내 크로스컨트리 경기장에 있는 '크래프트'에서 AT 스키나 노르딕 스키를 대여해 산악스키를 즐길 수 있다. 대여료(부츠, 스킨 포함) 3만원. 대한산악연맹 (02)414-2705

평창=글ㆍ사진 유상호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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