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윤형
칼럼니스트
일상생활에서 얻어낸 통찰을 정치영역에 결부하여 ‘설’을 푸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정치에는 특유의 문법이 있기 때문에, 이런 비유는 대개 정치에 대한 적당한 무지를 통해서나 환영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종종 청소만큼은 사정기관과 사법부 일반을 운영하는 원리에 관련해서 모종의 통찰을 제공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집안을 깔끔하게 정리하는 사람은 스스로 더러운 것을 만질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청소를 잘 하려면 청소도구부터 깔끔하게 관리해야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더러운 걸 만지는 걸 싫어하면 본인은 밖에서 깔끔하게 입고 다닐지언정 그 집안은 난장판인 경우가 많다. 청소는 더러운 걸 만지고 버리고 손을 씻어내는 일의 반복이다. 이를 정치영역에 대입한다면 사회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비리를 잘 근절하거나 관리할 수 있는 사람은 단순히 선량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는 그 비리에 눈살을 찌푸리고 외면할 정도로 순진해서는 안 되고(‘만지기’), 그것들을 처단할 정도의 용기가 있어야 하며(‘버리기’), 그러면서도 그 익히 잘 아는 비리에 자신이 전염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손 씻어내기’).
하지만 청소는 혼자서 하는 일이고, 통치는 여러 사람들의 분업과 협업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다른 종류의 조언이 필요하다. 가령 위정자 스스로가 위에서 말한 자세를 지니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위정자가 그런 종류의 업무를 담당하는 이들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다. 말하자면 위정자는 다소 순진해도 괜찮지만 사법이나 감찰의 업무를 담당하는 이들에 대해선 다른 잣대가 요구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을 다시 청소에 비유한다면 청소도구를 청소 후 깔끔하게 관리하는 문제와 엮어볼 수 있다. 청소도구를 깨끗하게 관리하는 일은 청소 그 자체만큼이나 중요하다. 청소도구를 더럽게 방치하면 나중엔 그걸로 청소를 해도 소용이 없고 다시 일정 상태를 회복하려면 손이 배로 간다. 이 역시 정치 영역에 쉽게 적용될 수 있다. 위정자는 본인이 ‘청소를 잘 하는 이’의 덕목을 획득하지 못하더라도 사정기관과 사법부 일반을 깨끗하게 관리하는 일을 통해 사회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 ‘청소도구를 청소’하는데 별로 공이 들지 않는 시점은 청소를 한 직후이지 다음 청소를 시작하기 직전이 아니란 것도 중요한 요점이다. 눈에 보일 만큼 더러워졌을 때가 아니라 평소의 관리가 필요한 것이다.
이동흡 헌법재판소장 후보자에 대한 일련의 논란에 속이 쓰린 이유도 그래서일 것이다. 헌법재판소는 이제 청소도구 같은 비유로는 설명하기도 어려울 만큼 추상화된 기구다. 단지 범죄나 비리를 처리하는 수준을 넘어 사법체계가 주어진 역할을 넘어 스스로 부정을 만들어 내는 상황을 바로잡고 그 가능성을 차단해야만 하는 기구다. 굳이 여기서도 비유를 한다면, 청소에 가장 효율적인 도구인 진공청소기(사법부)에 딸려 있는 필터를 청소하는 솔에 해당하는 기관이 헌법재판소다.
후보자가 문제가 되는 것은 단지 절차에 맞지 않게 세금을 착복하여 치부를 했다는 의혹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만으로도 그는 기관의 장에 부적격이겠지만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그는 이명박 정부 시절 헌법재판소가 국민의 기본권을 지켰다는 평가를 받는 몇몇 핵심적인 결정례에 대해 명확한 반대의견을 던진 사람이다. 시민교육 센터 대표인 이한 변호사가 트윗에 정리한 것에 따르면, 미네르바를 구속기소하게 했던 전기통신보호법에 관한 건, 경찰이 서울광장을 전경버스로 둘러서 원천봉쇄한 건, 야간옥외집회를 원천금지하는 법률조항에 관한 건, 인터넷으로 선거에 대한 의사표시를 원천금지한 건 등에 대해 위헌이라는 다수의견에 반대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말하자면 그는 이 사회에서 ‘청소도구’라는 집단에 속할 기본적인 청렴함도 결격하고 있을뿐더러, ‘청소도구에 대한 청소도구’라는 직능의 목적에 맞게 처신한 적도 없는 것이다. 이런 ‘도구’를 택하려는 위정자의 의도에 관심이 쏠리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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