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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궤 번역사업 본격 시작… '그림책' 신세 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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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궤 번역사업 본격 시작… '그림책' 신세 면한다

입력
2013.01.22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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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인양요 때 약탈당한 외규장각 의궤(191종 297권)가 프랑스에서 돌아온 지 1년 반이 지났다. 2011년 5월 이 귀한 책들이 모두 돌아온 데 이어 그해 12월에는 일제가 가져가 일본 궁내청에 있던 오대산 사고본 의궤 81종을 포함한 조선왕실 도서 150종 1,205종이 돌아와 기쁨을 더했다. 그러나 이 의궤들은 아직 하나도 번역이 안 됐다. 이 책들을 제외한 국내 소장 의궤도 사정은 별로 다르지 않아 전체 640여 종 가운데 6%도 안 되는 38종이 번역됐을 뿐이다.

의궤는 조선시대 국가의 주요 행사나 의식을 그림과 글로 꼼꼼히 정리한 보고서다. 왕실풍속사, 생활사, 경제사, 행정사, 국어사, 건축사 등 풍부한 자료를 담고 있지만, 한문으로 돼 있어 번역하지 않으면 내용을 모른 채 그림만 볼 수밖에 없다. 본격적인 연구도 할 수 없다.

이처럼 그림책으로 머물던 의궤를 국가 예산으로 번역하는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의궤를 비롯한 특수고전 번역 예산 8억원이 올해 처음으로 배정되어 한국고전번역원이 프랑스에서 돌아온 를 포함한 6종을 번역한다. 특수고전은 의궤, 법전, 의서, 과학기술서, 생활사 문헌 등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동안 같은 공식 사서나 개인문집을 주로 번역하느라 소외됐던 분야다. 문화재청이 2007년부터 해 온 국가기록유산 국역 사업도 종전 연간 1억 5000만원에 불과하던 예산이 올해 7억 5,000만원으로 크게 늘어나 본격 궤도에 오른다. 의궤와 각종 전적, 고문서를 망라한 기록유산 가운데 지정문화재를 중심으로 우선 번역할 대상을 정해 진행할 계획이다.

한국고전번역원은 이를 위해 2011년 특수고전번역실을 설치하고 준비해 왔다. 본격적인 착수에 앞서 시범 번역으로 이달 초 를 출간한 데 이어 상반기 안에 를 내놓는다. 정확한 번역에 의한 정본화가 목표다. 기존 번역은 오류가 많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여러 이본과 관련 자료를 철저히 대조해서 원문의 오류를 바로잡은 정본(定本) 텍스트를 마련하고 이를 대본으로 번역했다. 이 같은 원문 교감은 기존 번역에는 없던 것이다. 표점으로 끊어읽기를 표시하고 해설도 상세히 달았다.

올해 정부 예산 8억원으로 번역할 특수고전 중 외 나머지 5종은 조선시대의 가장 방대한 실용백과사전인 , 조선시대 형법인 , 함경도 지방의 연혁과 정황을 기록한 , 북간도와 백두산 일대가 조선 영토임을 밝힌 , 서얼의 허통 문제를 다룬 다. 이 책들도 표점 교감에 의한 정본화를 원칙으로 번역한다.

현재 특수고전 전체 분량은 7,000여 종, 1만 6,000여 권으로 추산되며 이 가운데 번역과 정리가 필요한 대상은 3,000종 7,000여 권에 이른다. 한국고전번역번원은 이 중 우선 번역할 중요한 것으로 자체 선정과 전문가 추천을 받아 325종 700여 권을 정했다. 이것만 번역하는 데도 수십 년이 걸릴 전망이다.

문화재청은 국가기록유산 포탈(www.memorykorea.go.kr)을 운영하면서 여기서 국역 서비스를 해왔다. 지금까지는 매년 5만자 정도를 번역했는데, 올해 예산이 크게 증액된 덕분에 박차를 가할 수 있게 됐다. 그래도 한참 걸리는 일이다. 문화재로 지정된 기록유산만 해도 아직 번역 안 된 것이 약 1억 1,600만자, 기존 속도대로라면 다 번역하는 데 2300년 이상 걸린다.

의궤 등 고전을 비롯한 기록유산 번역은 이처럼 100년 대계 그 이상의 장기 프로젝트가 될 수밖에 없다. 빨리 하는 게 능사도 아니다. 정확하게 해야 한다. 번역할 수 있는 전문 인력은 턱없이 모자라지만, 단기간에 양성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한문만 안다고 번역할 수 있는 게 아니고, 번역하려는 책의 종류와 성격에 따라 해당 분야 전문 지식도 있어야 하는데, 양쪽을 겸비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번역을 더디게 하는 또다른 장애물은 해당 문헌을 소장하고 있는 규장각과 장서각, 각 박물관 등이 서로 협조하거나 정보를 공유하지 않고 따로 노는 현상이다. 어디서 무엇을 번역하는지 알 길이 없다. 심지어 소장 기관이 자료를 주지 않아 번역을 포기한 예도 있다. 이처럼 따로 놀아서는 체계적이고 효율적인 번역이 불가능하다. 중복 번역이나 예산 낭비가 일어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의궤 등 특수고전 번역 예산이 생기고, 국가기록유산 국역 예산이 크게 증액된 올해는 한국사의 보물창고인 각종 기록유산 번역이 본궤도에 이르는 원년이라고 할 수 있다. 먼 길을 가려면, 정비해야 할 것이 많다. 전문가들은 번역을 할 전문 인력 양성과 더불어 유관기관 간의 협조 체제를 마련하는 것이 무엇보다 긴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렇게 기반을 다져 가면서 긴 호흡으로 해야만 조상들이 남긴 귀중한 유산들을 오늘의 것으로 제대로 향유할 수 있을 것이다.

오미환

선임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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