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이치억(38)씨에게 '퇴계의 17대 종손'이란 타이틀은 족쇄 같았다. 할아버지 고 이동은 선생은 매일같이 의관을 갖추고 사당에 참배를 한 후에야 아침 식사를 했고, 외출 하기 전에도 꼭 사당에 들러 제를 올렸다. 이렇게 유교적 가풍이 뼛속까지 배어 있는 경북 안동 도산서원 인근의 종택에서 이씨는 태어나 청소년기를 보냈다.
그는 21일 한국일보와의 통화에서 "어릴 때부터 종손이란 이유로 동네에서조차 다른 아이들처럼 '귀여운 나쁜 짓'을 하며 마음껏 놀지 못한 게 늘 불만이었다"며 "일본 유학을 선택한 것도 집안의 유교적 가풍을 벗어나고 싶은 바람도 컸다"고 털어놓았다. 이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애증의 관계'였던 유교와 종가를 떠나 일본 메지로대에서 아시아 지역 문화를 전공했다.
그랬던 이씨가 25일 성균관대 졸업식에서 유학을 연구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는다. 박사 학위 논문 주제는 '퇴계철학의 주리적 특성에 관한 연구'. 할아버지의 철학이기도 하다. 인간은 누구나 온전하고 완벽한 리(理)를 부여 받았기 때문에 그 자체가 성인으로, 퇴계가 나이와 신분을 가리지 않고 정성으로 사람을 대하고 심지어 초목이나 사물에게도 함부로 하지 않았던 이유도 주리철학의 핵심인 진정한 평등 사상을 실천한 것이었다는 내용이다.
이씨는 뒤늦게 유학 공부를 시작한 것에 대해 "긴 방황 끝에 서른이 넘어서야 제 갈 길을 찾았다"며 웃었다.
그가 본격적으로 유학에 흥미를 갖게 된 것은 2001년 고향인 안동에서 열린 퇴계 탄신 500주년 기념행사 때부터였다. "특히 퇴계 선생 학술대회에 참석하면서 내가 실은 유학을 제대로 알지도 모른 채 부정적으로 판단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대로 공부를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지요. 유교에 대한 제 부정적인 생각이 무엇 때문인지, 과연 그 본질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습니다."
이씨는 다음해 성균관대 유학대학원에 입학했고, 2005년 학위를 받은 뒤에는 박사 과정을 밟았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이근필(82)씨도 아들의 결정을 반겼다.
이씨는 "퇴계의 주손이 선조의 공부를 한다는 것이 많이 부담스럽지만 퇴계의 철학은 어려운 도덕론이기에 앞서 진정한 행복론이자 구원론"이라며 "앞으로 공부에 정진해 유학의 대중화와 관련해 우리 사회에 보탬이 되는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송옥진기자 clic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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