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월 21일 오후 7시 서울 여의도 63빌딩. 한국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간판 스타였던 송진우(한화), 양준혁(당시 해태), 마해영(롯데) 등은 초조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이 날은 한국 프로야구 선수들의 숙원이었던 ‘프로야구 선수협의회’결성이 예정된 날이었다. 하지만 400명에 가까운 서명에도 불구하고 구단의 방해 공작과 선수들간의 불협화음으로 인해 참석자가 없어 행사는 무산 위기에 처했다. 63빌딩까지는 왔으나 구단과 일부 선배들의 눈치를 보느라 건물 주변에서 배회하는 선수들도 적지 않았다.
자리를 지키던 선수 대표 8명은 각 구단의 선수 참석 방해를 비난하며 농성에 들어갔고 잠시 후 선수들이 하나 둘 회의장으로 모여들었다. 밤 11시쯤, 선수들이 119명에 달하자 자신감을 얻은 대표들은 회의장 임대 시간을 22일 새벽까지 연장하고 총회를 강행하기에 이르렀다.
“지금까지 받은 서명을 다 무효로 하고 다시 선수협 서명을 받겠습니다. 일단 출범이 중요하고 그 뒤에 회원을 늘려나가면 됩니다.” 서명 용지가 돌기 시작하자 대기업을 모기업으로 하는 삼성과 현대 선수들이 이탈했다. 최종적으로 남은 숫자는 75명. 이들의 노력으로 1월 22일 새벽, 우여곡절 끝에 한국 프로야구 선수협의회가 결성됐다. 한화에서 20년간 투수로 활약하다가 은퇴해 코치를 맡고 있는 송진우가 초대 회장을 맡았다. 평소 모범적인 선수 생활로 동료들의 귀감이 된 그는 아직도 ‘영원한 회장님’으로 통한다.
선수협 창립에 앞장섰던 선수들이 치른 피해는 혹독했다. 이날 한국야구위원회(KBO)와 각 구단 대표들은 총회 참석 선수들 전원에 대한 무조건 방출을 결의했고, 이는 양준혁과 마해영, 심정수, 강병규 등의 보복성 트레이드로 이어졌다.
붕괴 위기에 처한 프로야구는 시즌 내내 진통과 갈등을 겪다가 이듬해 1월 21일에야 정부의 중재로 선수대표와 KBO가 최종합의서에 서명했다. 선수협이 프로야구의 공식 기구로서 온전히 인정을 받은 것이다.
선수협의회 결성시도는 이 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첫번째 주동자는 프로야구 초창기의 대스타 최동원이었다. 1988년 9월, 7개 프로야구단 소속 선수 140여 명이 대전 유성의 호텔에 모여 최동원을 회장으로 추대했지만 구단들이 가만있을 리 만무했다. 재계약 불가 및 블랙리스트를 만들었다. 당시 롯데의 간판스타였던 최동원과 김용철은 결국 삼성의 김시진, 장효조와 트레이드 되고 말았다. 선수협 구성이 불발된 후 몸에 맞지 않는 유니폼을 입게 된 최동원과 장효조는 야구에 대한 열정이 식은 채 쇠퇴기에 접어들었으며 2011년 9월 일주일의 간격을 두고 나란히 세상을 떠나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지금은 한국 최고 인기스포츠로 자리잡은 프로야구지만 그 바탕에는 앞선 이들의 땀과 희생이 있었던 것이다.
손용석기자 stone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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