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태순
정치평론가
‘팍타 순트 세르반다’(pacta sunt servanda). 약속은 지켜져야만 한다는 고대 로마법의 대원칙이다. 오늘날 전 세계 민법과 국제법의 대원칙이기도 하다. 신의성실의 원칙이 지켜지지 않으면 사회공동체는 혼란과 무질서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하지만 예외는 있다. 아무리 당사자 간의 약속이 중요하다고 해도 강행법규와 사정변경의 원칙에 의해서 제한될 수 있다.
셰익스피어의 희극 ‘베니스의 상인’을 보자. 주인공이 사채업자 샤일록에게 돈을 빌리면서 주인공의 친구가 보증을 선다. 살 1파운드를 담보로 삼아서. 나중에 재판정에서 재판관은 ‘약속은 지켜져야 하는 것’이므로 살 1 파운드를 떼어내되, 계약서상 살만을 담보로 했으니 피는 단 한 방울도 흘리면 안 된다는 절묘한 판결을 내린다.
만약 요즘 베니스의 상인에서와 같은 계약을 했다면? 재판정에 갈 필요조차 없다. 이는 계약 자체가 무효다. 상대방의 절박함과 곤궁함을 빌미로 장기를 담보하여 돈을 빌려주는 것 자체가 위법이다. 당사자 간 신의성실의 법익보다 공익을 지키는 것이 더 큰 법익이기 때문이다.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다. 충돌하는 여러 가치 중 어느 것을 선택하느냐가 늘 문제다.
대선이 끝난 지 한 달이 지났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의 공약을 두고 말들이 많다. 정부와 여당에서는 현실적으로 공약을 다 지키려다 보면 나라살림이 결딴날 지경이니 수정해야 한다고 한다. 이른바 대선공약의 출구전략을 마련해야 한다고 아우성이다. 하지만 박 당선인이나 인수위 측에서는 요지부동이다. 약속은 지켜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박 당선인은 대선공약을 발표할 때 그것을 만든 사람들에게 피곤할 정도로 따지고 또 따져서 준비한 것이라고 했다. 또 최근에는 공약수정을 두고 가타부타하는 것은 시기상조며 그런 것(수정)은 새 정부 출범 후에나 할 일이라고 선을 그었다. 정치인생 15년을 오롯이 ‘원칙과 신뢰’로 버텨온 박 당선인의 곧은 마음가짐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생각에 조금만 더 여유를 가질 필요는 없을까. 우선 박 당선인의 얘기대로 공약을 만든 사람들이 최선을 다해 준비한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자.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전문가들이 전지전능한 신은 아닐 것이다. 제한된 정보 속에서 이상적인 그림을 그릴 수 있다. 또 자신들의 구상을 설명하면서 실현가능성에는 확신이 없다고 보고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지금 박 당선인이나 인수위 측은 공약수정론을 관료를 포함한 기득권집단의 저항 내지 반발로 인식하는 듯하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아니 그러고도 남는다. 하지만 그것도 현실이다. 그런 저항과 반발까지도 감안해야 한다. 결국 공약을 집행하는 것은 바로 그 기득권집단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순응과 참여를 이끌어내는 것이 지도자의 리더십이다.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만든 여권에서는 공약을 수정하라고 목청을 높이는 반면 야권과 진보지식인들은 앞 다투어 박 당선인이 공약을 100% 지켜져야 한다고 역성을 든다. 블라인드테스트를 하면 어느 쪽이 박 당선인 편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그들도 안다. 박근혜 대통령이 원칙을 고수할수록 나라살림이 어려워진다는 것을. 그만큼 5년 후 집권 가능성 또한 커진다는 것도.
삼국지에 나오는 일화 한 토막. 조조가 행군에 앞서 논밭을 훼손하면 사형에 처한다고 엄명을 내렸다. 그런데 하필이면 조조의 말이 놀라 논밭을 망쳐놓았다. 조조는 약속을 지키겠다며 스스로 목을 자르려고 한다. 과연 약속은 지켜져야만 하는 것일까. 조조는 자결하는 대신 상투를 자른다. 연의(演義)에서는 이를 조조의 간교함으로 묘사했으나 역사상 사실은 다르다.
진한시대에 머리털을 자르는 것은 ‘곤겸성단용’이란 사형 바로 아래에 해당하는 중형이다. 극단이 아니라 대안을 선택함으로써 군기도 엄정하게 하고 원칙도 지키는 묘수 중의 묘수다. 박 당선인에게도 발상의 전환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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