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권사 영업담당 김모(42) 팀장은 요즘 부쩍 늘어난 투자자들의 문의에 응하느라 분주하다. 연초부터 "이제 주식에 투자해도 되겠느냐"는 전화가 쇄도하고 있는 것이다. 당연한 일 같지만 문의 고객의 정체가 심상치 않다. 대부분 글로벌 금융위기와 유럽 재정위기를 겪으면서 주식을 떠났던 이들이고, 개중에는 이른바 '큰 손'도 많다. 김 팀장은 "아직 실제 투자로 이어진 사례는 드물지만, 다시는 주식에 손대지 않겠다던 고객들까지 증시 전망을 묻는걸 보면 상황이 달라진 건 사실"이라고 말했다.
절세(節稅)에 목맨 부자들의 돈이 움직이고 있다. 금융소득종합과세 기준금액이 기존 4,000만원에서 2,000만원으로 낮아지면서 예금에 묶어뒀던 자금을 피난처로 이동시키고 있는 것이다. 즉시연금 등이 인기라지만 장기간(10년 이상) 돈을 묵히는 게 부담스럽고, 생소한 상품이나 몇 차례 쓴맛을 맛본 주식엔 선뜻 투자하기가 겁난다. 때문에 눈치를 보는 돈들이 단기상품으로 급속히 몰리고 있다.
20일 금융투자협회와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단기금융상품의 대표주자인 머니마켓펀드(MMF) 설정금액이 17일 현재 77조6,057억원으로 지난해 말보다 15조원 가까이 늘었다. 돈의 임시대피소 역할을 하는 종합자산관리계좌(CMA) 잔액 역시 올 들어 2조원가량 증가했다. 은행 예금에서 세금 부담이 없는 단기상품으로 말을 갈아탄 셈이다.
당장은 아니지만 새 정부의 경제정책과 대외환경 변화에 따라 언제든 새로운 투자처를 찾아 떠날 수 있는 자금들이다. 금융투자업계에선 "부자들이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었다"고 표현한다. 총성이 울리면 자산가들의 자금 이동이 본격화하리라는 것이다.
금융투자업계는 부자들의 총구가 결국 직ㆍ간접적으로 증시를 향할 것으로 예상한다. 지난해만 해도 주식 얘기는 가급적 삼가고 절세 타령만 했던 증권사들이 최근 투자설명회에 다시 증시 전망을 끼워 넣는 것도 절세와 주식의 상관관계를 강조하기 위해서다. 상장주식은 양도 차익이 비과세라 매력적인 절세 수단이기 때문이다.
조완제 삼성증권 투자컨설팅팀장은 "절세상품에 대한 수요는 급증하지만 기대수익이 낮은 채권관련 상품이 많아 비과세인 주식이 대안으로 부상할 것"이라고 말했다. 아무래도 부자들은 보수적인 성향이 강해 그간 실패를 안긴 주식형펀드보다는 우량주나 배당주, 상장지수펀드(ETF) 등에 관심을 가질 것으로 보인다.
반 토막으로 급감한 주식 거래량이 지난해 1분기 수준으로만 살아나더라도 증시 활황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 실제 증시 대기자금으로 불리는 예탁금은 올 들어 1조원가량 늘었고, 부자들의 펀드인 사모(私募)펀드 잔액 역시 증가 추세다.
그러나 아직은 채권의 위력이 강하다. 물가연동국채는 절세상품으로 각광 받으면서 하루 평균 거래대금이 지난해 말보다 3배 가까이 치솟았다. 국고채권 가격도 작년 말 1만680원에서 한때 1만817원까지 올랐다. 아직은 채권이 인기지만, 새 정부의 경기활성화 대책에 발맞춰 언제든 주식으로 갈아타기 위해 단기금융상품에 실탄을 차곡차곡 쌓아두고 있는 것이다.
고찬유기자 jutda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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