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대 대선이 끝난 지 한 달이 지났다. 지난 대선은 보수와 진보 진영의 총력전 양상에도 경제정책에서 차별성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았다. 극좌 편향을 보이다 작년 4월 총선에서 패배한 진보는 그간 보수진영의 구호였던 성장과 일자리를 부쩍 강조했고, '줄ㆍ푸ㆍ세(세금 줄이고, 규제 풀고, 법질서 세우자)'로 서민경제를 어려움에 빠트렸던 보수는 경제민주화와 복지 강화 등 진보적 어젠다를 대폭 수용했기 때문이다.
보수의 변신은 득표전략의 일환이었지만, 양극화 해소와 사회적 갈등 완화라는 시대적 요구에 따른 불가피한 선택이기도 했다. 최근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선보인 정부조직 개편안이 기존 보수정권의 상징인 '작은 정부'와 달리, 경제부총리 부활과 2개 부처 신설ㆍ복원 등 정부 역할을 강조하는 '큰 정부'를 지향한 것도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을 요구하는 시대정신의 반영일 것이다.
그런데 새 정부가 출범도 하기 전에 보수층의 '복지 발목잡기'가 시작돼 우려된다. 박 당선인이 무리하게 복지공약을 강행할 경우 경제가 망가질 것이라며 노선 수정을 압박하고 나선 것이다. 중도 표심을 잡기 위해 복지 확대를 약속했지만 핵심 지지세력이 원치 않는 방향인 만큼 공약에 얽매이지 말고 현실적으로 조정해야 한다는 논리다.
경제민주화와 복지 강화라는 진보적 과제에 저항하는 세력의 중심에는 관료들이 있다. 특히 복지공약 이행과 밀접한 보건복지부와 경제부처 관료들은 벌써부터 "복지공약 실현을 위해선 박 당선인 측이 추계한 예산보다 훨씬 많은 돈이 들 것"이라며 공약 수정을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 박 당선인은 과연 관료들의 저항을 이겨낼 수 있을까?
참여정부에서 청와대 정책실장과 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 장관을 지낸 김병준 국민대 교수는 "집권해도, 대통령이 돼도, 세상 바꾸기가 쉽지 않다"고 했다(에서). 그는 주된 이유로 사사건건 개혁의 발목을 잡는 관료조직의 저항을 꼽았다.
실제 그간 거의 모든 정권이 관료조직에 휘둘리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주저앉은 게 현실이다. 강력한 개혁 의지로 출범한 노무현 정부가 정권 초기 관료집단 개혁을 시도했으나 똘똘 뭉쳐 밥그릇 지키기에 나선 직업관료들의 벽을 뚫지 못한 게 대표적이다. MB정부도 초기에는 기업인 출신 대통령의 개인적 경험에 따른 부정적 인식 탓에 '모피아'로 불리는 재무관료를 멀리했지만, 결국엔 그들에 포위돼 대기업 중심 성장전략을 밀어붙였다.
한국의 관료집단은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유능하고 전문성도 갖췄다. 관료들의 치밀한 기획력과 외환ㆍ금융위기 대응 경험은 국가운영을 맡은 세력에겐 큰 자산일 수밖에 없다. 둘째, 직업공무원제의 울타리 속에서 신분 보장이 철저하다. 대통령의 관료 통제력에 한계가 있다는 뜻이다. 셋째, 직업공무원제가 수십 년 동안 이어져 오면서 사회 각계로 진출한 선후배들이 밀어주고 당겨주는 커뮤니티가 공고하다. 이 커뮤니티는 정치권력 및 자본과도 연결돼 공고한 이익집단을 형성하고 있다. 관료 커뮤니티의 정서가 집권세력의 철학과 정책보다 우선하는 경우를 수없이 경험했다는 게 김병준 교수의 토로다. 넷째, 관료들은 세수(稅收) 관련 자료 등 주요 정보를 합법적으로 독점하고 있다. 정보ㆍ권력기관의 개인정보 집중 및 감시를 통해 국민의 일거수일투족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이는 필요한 경우 개혁 정책을 좌절시키는 무기로 적절히 활용될 수 있다. 다섯째, 한국의 관료집단은 변화와 혁신을 두려워하는 보수주의자들이다. 특히 엘리트 관료들은 상당수가 미국 유학을 경험한 친미 개방주의자요, 뼛속까지 신자유주의 신봉자들이다.
한국 사회는 지금 계층ㆍ지역ㆍ세대 간 첨예한 갈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기득권층의 양보로 양극화를 누그러뜨리지 않으면 언제 폭발할지 모른다. 시대 흐름과 동떨어져 보이는 '정통 보수' 박근혜의 당선은 경제민주화와 복지 확대라는 진보적 의제를 과감히 수용했기에 가능했다. 만일 '박근혜 복지'가 관료들의 저항에 막혀 공염불에 그친다면, 집권 첫해부터 지지율이 곤두박질한 MB정권의 전철을 밟을 수도 있다.
고재학 경제부장 goindo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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