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빌헬름 2세는 리훙장(李鴻章·1823~1901)을 가리켜 '동양의 비스마르크'라고 했다. 독일 역사에서 최초로 통일을 이룩했던 정치가에 비견될 만큼 중국 정치사에서 중요한 인물이라는 의미다.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해 명성을 얻은 리훙장은 만주족 관원 일색인 중앙 정계에 진출해 요직을 차지한 한족계 정치가였다. 청나라의 정치 체계를 유지하면서도 군사, 과학 등의 분야에서 서구화를 추진해 외세에 맞서려 했던 그는 쇠락해가는 청나라를 대표해 외국 열강들을 상대로 굴욕적인 조약을 연이어 체결해야 했던 비운의 인물이기도 했다.
리훙장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당시 중국인들은 청일전쟁의 패배와 굴욕적인 조약 체결 책임을 그에게 돌리며 매국노라고 비난했다. 세월이 흘러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중국을 강대국으로 만들려 했던 그를 애국자이자 민족주의 정치가로 재평가하고 있다.
을 쓴 사상가 량치차오(梁啓超·1873~1929)는 '지은이의 말'에서 "나와는 정적(政敵)이고, 사적인 친분 또한 깊지 않기 때문에 그를 변호해 주고픈 마음이 있을 리 없다"면서도 "이 책 속에는 그를 변호하거나 그를 위해 해명하는 말이 많다"고 적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공정하게 서술하겠다는 의지다.
량치차오는 리훙장을 가리켜 "재능은 있었으나 학식이 부족했고, 경험은 있었으나 혈기가 부족했다"고 평가했다. 군사만 알고 민정은 몰랐으며, 외교는 알았지만 내정은 몰랐고, 조정은 잘 알아도 국민은 잘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리훙장의 명성도 청일전쟁 패배와 함께 만신창이가 됐다. 모두들 리훙장의 잘못이라고 비난할 때 량치차오는 실패의 원인 중 절반은 그를 방해하는 무리들 때문이었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리훙장의 과오을 꼬집으면서도 "오늘날 리훙장 같은 인물을 또다시 찾아보기는 거의 불가능할 것"이라고 단언한다. 독자의 판단을 돕기 위해 리훙장이 처했던 위치와 상황을 먼저 이해하라며 당시의 시대상을 설명하고 군사가, 양무운동의 선구자, 외교가로서 공과를 꼼꼼히 살핀다. 리훙장이 역사 속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제갈량, 왕안석, 비스마르크, 이토 히로부미 등과 비교한 점도 흥미롭다.
고경석기자 kav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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