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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도 반세기전 난민 많아… 그런데 왜 난민을 안 돕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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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도 반세기전 난민 많아… 그런데 왜 난민을 안 돕죠?"

입력
2013.01.18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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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만장' 욤비씨카빌라정권 탄압 피해 무작정 탈출 남북한도 구분 못한 채 한국 땅에 정글서 숨어살던 가족들 데려와한국사회의 맨얼굴다른 나라 사정·문화 이해 안해 공장선 원숭이·기계 취급 다반사 쓴소리 왜 하냐구요? 사랑하니까"나의 꿈은요"콩고 민주화 이루면 돌아가야죠 난민 보듬는 코리아 만들고 싶어 두나라 잇는 가교역할 매일 다짐

난민(難民)은 인종, 종교, 정치적 이유 등으로 인한 박해를 피해 제 나라를 등진 사람들이다. 한국은 1992년 유엔 난민협약에 가입했지만, 난민을 받아들이는 데 매우 인색했다. 지난해 5월까지 신청자 4,516명 가운데 난민 인정을 받은 사람은 294명뿐이다. 실제 심사를 받은 이들 대비 인정률은 13%로 세계 평균(30%)에 한참 못 미친다. 아프리카 콩고민주공화국 출신인 욤비 토나(46)씨는 그 높은 문턱을 용케 넘은 '행운아'다.

콩고는 1960년 벨기에 식민지에서 독립한 후 모부투의 32년 독재에 이어 인접국들이 뒤엉킨 내전을 겪으며 세계 5위의 난민 발생국이 됐다. 킨샤사 국립대를 졸업하고 비밀정보국(ANR)에서 일하던 욤비씨는 2002년 조셉 카빌라 정권과 반군 간 추악한 거래를 폭로한 문서를 야당에 넘겼다가 반역죄로 체포됐다. 동료들의 도움으로 탈옥한 그는 중국 비자가 찍힌 가짜 여권을 들고 여장을 한 채 비행기에 올랐다. 중국을 거쳐 한국 땅을 밟은 것은 그 해 9월. 인천항에서 택시를 잡아 타고는 이렇게 물었다. "평양이 여기서 먼가요?" 남북한조차 구분하지 못했던 그에게 한국은 낯설고 무서운 땅이었다. '깜둥이' 소리 듣고 월급을 떼이는 등 이주노동자들이 다반사로 당하는 고초는 난민 심사에서 겪은 좌절에 비하면 견딜 만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법무부를 상대로 행정소송을 내 2008년 2월 난민 인정을 받았고, 정글에서 숨어 살던 가족들도 그 해 여름 무사히 한국에 왔다.

욤비씨의 파란만장한 삶이 최근 책으로 엮여 나왔다. 공동저자인 박진숙 에코팜므 대표의 말처럼, (이후 발행)에는 '우리 자신이 미처 깨닫지 못했던 한국 사회의 맨얼굴'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지난 14일 일터인 인천 부평의 UIC시카고치과병원에서 만난 욤비씨는 "콩고의 민주화, 그리고 한국이 난민들이 살아가기 좋은 곳으로 만들고 싶은 두 가지 꿈을 이루기 위해 책을 썼다"고 했다. 한국어와 영어를 섞어 4시간 가까이 진행된 인터뷰가 끝날 무렵, 책을 내밀며 사인을 부탁했다. 그는 환한 웃음으로 답하며 영어로 이렇게 적었다. "이 책이 콩고와 한국을 잇는 다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책에 나온 삼남매의 좌충우돌 한국 적응기를 재미있게 봤습니다.

한국말 때문에 2년 낮춰 학교 간 큰아들 라비는 3월이면 중학생 돼요. 여전히 축구선수가 꿈이에요. TV도 축구 채널만 보고, 축구 얘기만 해요. 우리 부부는 이 꿈 안 좋아요. 콩고에 가면 축구선수 (살기) 힘들어요. 공부 해야 다른 길 있어요. 축구팀 못 가게 하니까 감독님들 전화하고 집에도 찾아와요. 그래도 할 수 없어요. 초등학교 6학년 올라가는 둘째 조나단은 목사님이 꿈이라 교회에서 살아요. 아내가 목사님 딸이라 기도 많이 하고 깨어있을 땐 항상 찬양하는데, 엄마 닮았나 봐요. 파트리샤는 이제 5학년 되는데, 꿈이 오늘은 선생님, 내일은 닥터, 매일 바뀌어서 아직 몰라요.(웃음)

-두 달 전 막내 딸 아스트리드가 태어났죠?

넬리(아내)가 허리 디스크로 3년 동안 아파서 아기 생각 전혀 없었는데, 갑자기 임신이 됐어요. 맨날 '우리 동생 주세요' 했던 파트리샤가 엄청 예뻐해요. 걱정도 있어요. 한국법은 외국인 아기 태어나면 국적 안 줘요. 콩고법은 외국에서 아기 태어나면 6개월 안에 대사관에 신청해야 하는데, 우린 난민이라 대사관 못 가니까 우리 아기 무국적자예요. 난민 신청해서 ID 나오면 의료보험도 되고 한국서 사는 데는 문제 없어요. 아직 의료보험 없는데 아기가 아파서 병원 갔더니 25만원이나 나왔어요. 너무 비싸요.

-넬리씨 산후 조리는 어떻게 하나요?

한국에서 미역국 먹듯이 콩고에선 카사바 나무 잎을 끓여 먹어요. 프랑스에 있는 친구한테 부탁해 구했어요. 아프리카 전통음식인 옥수수 가루로 만든 떡 '푸푸'도 해줘요. 근데 우리 둘만 먹어요. 아이들은 맛 없다고 안 먹어요. 학교랑 교회에서 맨날 먹으니까 이제 한국 음식만 좋아해요. 어제 김치찌개 끓였어요. 넬리 요리 따로, 애들 요리 따로, 제가 힘들어요.(웃음) 일 당번 정했어요. 요리랑 큰 청소, 빨래, 쓰레기 버리기는 제가 하고, 파트리샤는 설거지, 라비는 방 청소, 조나단은 거실 청소 시켜요. 방학인데 학원 같은 데 보낼 돈이 없어 집에만 있으니 심심해 해요. 미안해요.

욤비씨는 한국 생활에 빠르게 적응하는 아이들이 대견하면서도 그만큼 콩고에 대한 기억?잃어가는 게 안타깝다고 했다. 언어도 문제다. "우리 집에선 네 가지 말 해요. 넬리랑 저는 링갈라어로 대화하고 비밀 있을 땐 아이들이 모르는 키콩고어를 써요. 아이들한테는 (콩고 공용어인) 불어를 쓰게 하는데, 자기들끼리는 한국말 해요. 그게 더 편한 거예요. 불어를 잘 못하는 파트리샤는 '선생님이 집에서도 한국말만 쓰랬어'하고 불만 말해요. 걱정 많아요. 아스트리드는 무슨 말부터 가르쳐야 할 지 모르겠어요.(웃음)."

-아이들이 언젠가 콩고로 돌아가야 한다는 걸 알고 있나요?

휴~ 어려운 문제예요. 파트리샤는 할머니 보고 싶으면 콩고 간다 하고, 라비는 축구 경기 할 때만 콩고 국가대표로 간대요. 아직 어리니까 여기서 살고 싶은 거죠. 책 쓰면서도 아이들 생각 많이 했는데, 책 보고 '어, 우리 아빠 이런 일 했어요? 우리가 가서 바꿀게요'라고 말해요. 우리가 왜 한국에 왔는지, 왜 콩고로 돌아가야 하는지, 더 깊은 얘기를 조금씩 해주고 있어요. 미국이나 캐나다, 유럽도 그렇고 한국에서도 난민들이 일정 기간 체류하고 자격 갖추면 국적 바꿀 수 있어요. 저는 이거 반대해요. 다른 난민들한테도 당신 나라 사정 좋아지면 돌아가세요, 해요. 그 나라, 그 사회에 문제가 있어 난민이 된 거잖아요. 돌아가서 다시는 그런 일 없게 살기 좋은 나라로 만들어야 할 책임이 있어요.

-명함에는 글로벌 마케팅팀으로 찍혀 있는데, 병원에서 무슨 일을 하나요?

외국인 환자 오면 통역하고 그런 일 하려 했지만, 외국인 거의 없어요. CCTV 모니터하고 주차장에서 부르면 파킹해주고…. 우리 가족 후원해주시는 지엠대우에서 일자리도 마련해줬어요. 내 머리를 써서 일하면 좋을 텐데, 별로 하는 일 없이 월급 받으니 조금 부끄러워요. 그래도 월세에 도시가스, 전기료, 전화비만으로 월급의 절반 이상이 나가니 늘 부족하죠. 얼마 전 이사했는데 전 집주인이 보증금 1,000만원 안 주고 도망갔어요. 경찰서 갔더니 법원 가서 재판 하라는데 변호사비도 없고 시간도 오래 걸리잖아요. 지금 집 주인이 보증금 얘기 꺼낼까 봐 집에 물 새고 보일러 안 돼도 컴플레인 못해요. 쫓겨나면 안 되는데….

-욤비씨는 난민 문제 관련해서는 이미 유명인사인데, 책 나오고 인사를 많이 받았겠어요.

책에는 제가 하고 싶었던 말의 10%밖에 못했어요. 다 하면 1,500페이지도 넘을 걸요.(웃음) 난민지원단체인 피난처, 난민인권센터 식구들, 대학 등에서 난민 문제 강의하며 알게 된 학생들, 정말 많은 분들이 축하해줬어요. 유엔난민기구 한국대표부에서는 책을 100권이나 사줬어요. 페이스북에서 '한국에 이런 문제 있는지 몰랐다'며 격려해주시는 분들도 많아요. 그런데 책 보고 화 내는 사람도 조금 있어요. 왜 한국에 대해 나쁜 얘기 썼냐며. 한국은 저한테 두 번째 나라예요. 그만큼 사랑하니까 안 좋은 건 바꿔주세요, 할 수 있는 거예요. 좋아하는 사람 머리에 뭐가 묻어 있으면 얘기하잖아요, 화장실 가서 떼라고. 싫은 사람한테는 안 그래요. 이런 문제 있어요, 바꿔주세요, 그런 마음으로 책 썼어요.

-10%밖에 못 썼다고 했는데, 더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인가요?

그래서 또 책 쓰고 있어요. 첫 번째, 난민 심사하는 법무부에 문제 있어요. 난민 신청하는 사람들 문화를 너무 모르고, 한국식으로만 접근하니 말이 잘 안 통해요. 제가 인터뷰할 때 킨샤사 공항에서 비행기 탔다니까, 안 믿어요. 인천공항 생각만 하는 거죠. 킨샤사 공항은 규모도 작고 다 뚫려있어 누가 나가도 잘 몰라요. 또 콩고에 비하면 한국 감옥은 모텔이에요. 콩고 감옥엔 침대 없어, 창문 없어, 라이트 없어, 밥도 잘 안 줘요. 근데 그렇게 말하면 거짓말이래요. 그 나라 사정과 문화를 알아야 진짜 난민, 가짜 난민 알 수 있어요. 그 방법 알려주려고 해요.

두 번째는 한국에 오는 외국인, 특히 아프리카 사람들한테 한국 문화에 대해 얘기해주고 싶어요. 외국인들은 한국 사람들의 애국심, '무조건 한국 최고야' 이런 마음 잘 몰라서 문화적 충돌 일어나요. 제가 외국 친구들한테 얘기해요, 한국에 왔으니 한국 스타일 따라주세요. 어떤 사람들은 욤비는 한국 사람들한테 돈 많이 받아서 좋은 말 한다고 해요. 답답해요. 어떻게 하면 한국 사람들하고 어울려 살 수 있는지 말해주려고 해요. 영어와 불어로 벌써 70%쯤 썼어요. 라고 제목도 생각해 뒀어요.

-외국인이 이해하기 힘든 한국의 독특한 문화에는 어떤 게 있나요?

처음 만나면 어디서 왔는지 묻고는 몇 살이에요? 하는 거, 외국인들 눈에는 이상해요. 나이는 왜 묻냐, 저 사람 스파이 아니냐고 화를 내요.(웃음) 제가 설명해요. 한국에선 친구끼리 쓰는 말, 나이 많은 사람한테 쓰는 말, 동생한테 하는 말 다 따로 있다고. 그래서 나이가 중요하다고. 아프리카에서 왔다면 다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 취급하는 것은 문제예요. 아프리카에도 부자 있어요. 공장, 아파트, 대학, 자동차 다 있어요. 세계는 하나예요. 우리가 아무리 오래 살아도 고작 100년이잖아요. 어렵지만 조금씩 바꿔가면서 한국 사회가 더 나은 사회가 될 수 있게 하는 데 제 힘을 보태고 싶어요.

-한국에서 난민 심사 과정 말고 가장 힘들었던 일, 또 가장 좋았던 일은 무엇인가요?

공장 있을 때 나쁜 일 많았어요. 이주노동자 사람 아니에요. 원숭이 아니면 기계예요. 야, 새끼야, 깜둥이, 이런 말 맨날 들어요. 한 사장님은 새로 들어온 기계 작동법 딱 한번 빨리 말하고 못 알아듣는다고 뺨 때리고 옷 가방에 먹던 음식까지 마구 담아 밖에 버렸어요. 돈도 안 주고, 다른 데 가지도 못하게 하고…. 피난처 이호택 대표팀이 '욤비, 나랑 같이 일해' 했을 때 정말 기뻤어요. 피난처에서 처음으로 사람 대접 받았어요. (자료에 있던 이 대표 사진을 보여주자) 오우, 우리 형! 진짜, 많이, 도와줬어요. 에코팜므 박 대표님, 남편이신 공익법센터 어필의 김종철 변호사님, 처음 한국 왔을 때 함께 살게 해준 임병해 대표님, 난민인권센터의 김성인 사무국장…. 모두 고마운 분들이에요.

-정말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는데, 그냥 입 다물고 살 걸 하고 후회한 적은 없나요?

예? 파랑…? (설명을 듣고는) 맞아요, 맞아. 그런데 후회 없어요. 제 문제가, 이렇게 딱 한번 생각하면 마인드 체인지 어려워요. 난민활동가 친구들도 '욤비는 너무 직설적이야' 해요. 하지만 문제 있는데 말 안 하면 달라지지 않잖아요. 아무리 돈 주고 밥 줘도 문제 있으면 바로 얘기해야 해요. 카빌라 정권 무너지고 콩고에 돌아갔을 때 똑 같은 문제 있으면 똑 같이 할 거예요. (머리에 무거운 짐 이는 시늉을 하며) '무거워, 돈가방' 이러고 평생 어떻게 살아요? 난 자유를 원해요. 난민들, 힘없고 가난한 사람 아니에요. 잘못에 대해 '노'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들이에요.

-어쩌다 한국에 왔을까 한탄도 많이 했을 것 같은데요.

난민은 어느 날 짐 싸서 원하는 곳 찾아가는 여행자가 아니에요. 지금 이 탁자 밑에 폭탄이 설치돼 1분 뒤에 터진다고 생각해 봐요. 저 문은 잠겼어요. 그냥 앉아서 죽어요? 창문 부수고 뛰어내려야죠. 다리가 부러질 수도, 죽을 수도, 요행히 살 수도 있어요. 난민이 바로 그런 케이스예요. 중국에 가보니 인권 없고, 콩고와 동맹관계고, 그래서 다시 뛰어내린 곳이 한국이었죠. 난민 문제만 보면 한국은 '열린 감옥'이에요. 이 나라 안에선 부산이든 어디든 갈 수 있지만, 난민 인정 못 받으면 일 못해요.

-7월 시행되는 새 난민법에선 난민 인정 신청 6개월이 지난 경우 취업을 할 수 있게 하는 등 처우 개선이 많이 이뤄졌다고 들었습니다.

맞아요. 난민들에게 큰 선물이에요. 한국 법무부에 감사해요, 진짜. 하지만 더 많이 개선해야 해요. 돈 없고 힘 없는 여성 난민들 성매매 해요. 불법인 줄 알아도, 당장 몸 아프고 배고픈데 어쩌겠어요. 난민 여성과 아이들, 위험에 처한 약자들만이라도 보호해 주세요. 지금 한국에서 문제는 법이 아니에요. 사람들 생각, 문화가 문제죠. 난민이 뭔지, 그런 사람이 있는지도 몰라요. 법무부도 난민실 말고는 몰라요. 공항 출입국관리소에서 난민여행증명서 보고는 이거 뭐야, 어디서 받았어? 이래요. 지난번 캐나다 갔다 돌아올 땐 여행증명서, 명함, 국민은행 카드, 운전면허증, 집 전세계약서까지 다 꺼내놨는데도, 한국에 왜 왔어? 이러면서 질문 질문 질문… 어휴. 난민실 직원, 난민단체 인턴들이 난민들 신상 정보를 아무 데서나 막 얘기해요. 위험에 빠뜨릴 수 있어요. 한국 사람들 비밀 너무 없어요. 난민에 대한 리스펙트가 없어서 그래요. 존중해 주세요.

-책에 보니 5ㆍ18 광주민주항쟁에 대단히 관심이 높던데요.

성공회대에서 아시아비정부기구학 석사과정 하면서 아시아 여러 나라 역사, 특히 민주화 과정에 대해 많이 배웠어요. 콩고 민주화 하려면 5ㆍ18같은 저항 필요해요. 대통령, 정치인들한테 이렇게 해주세요, 아무 효과 없어요. 우리 다 일어나면 바꿀 수 있어요. 다 죽을 수 있지만, 우리 아이들 세대 잘 살 수 있어요. 지금 우리 안 일어나면, 우리 아이들, 그 아이들의 아이들 세대 계속 못 살아요. 1960년대 아프리카 독립도 그 세대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잖아요. 아프리카 나라들, 한국의 민주화 과정 배워야 해요. 콩고 방송(인터넷 라디오)에서 자꾸 코리아 말해 제 닉네임이 '코리안'이에요.(웃음) 옛날에 가난했던 한국이 이렇게 잘 살고 민주화도 됐는데 따라 배워야 한다고 얘기해요. 우리 세대에 못 하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스탠드 업, 스탠드 업 하면 언젠가는 바꿀 수 있어요.

-한국인들에게 가장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인가요?

한국도 1950년대에는 난민 많이 나왔어요. 다른 나라 가서 나쁜 일도 겪었겠지만 지원도 많이 받았어요. 이제 민주화도 됐고, 경제도 괜찮고, 인권도 獵쨉? 왜 다른 나라에서 온 난민들 지원 안 해요? 그 역사 잊어버려서 그래요. 기억해야 해요. 누구나 난민이 될 수 있어요. 우리 지금 여기서 같이 살아요. 우리가 좋은 기억 갖고 콩고에 돌아가면 열심히 한국 알려요. 한국 이미지 올라가요. 콩고의 민주화와 난민들 살기 좋은 한국, 두 가지 꿈 따로 아니에요. 우리가 두 꿈, 두 나라를 잇는 다리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이희정 선임기자 jay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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