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프로에 입문한 10대 초반의 새내기 기사들이 정상급 선배들과의 맞대결에서 뜻밖의 승리를 거둬 새해 바둑가를 깜짝 놀라게 했다. 지난 11~13일 벌어진 '2013 새로운 물결, 영재 vs 정상 바둑대결'에서 변상일(16 · 2단), 신민준(14 · 초단), 신진서(13 · 초단)로 구성된 영재팀이 이세돌, 최철한, 이창호의 정상팀에게 2대1로 승리했다.
또 지난해 7월 입단한 국내 최연소 프로 기사 신진서와 입단 동기 신민준이 각각 이창호와 최철한에게 불계승을 거뒀고, 작년 1월 입단한 변상일은 이세돌과 팽팽한 접전 끝에 아쉽게 반집을 졌다. 신년 초라 국내외 바둑계에 이렇다 할 큰 이슈가 없는 시점이어서 이 소식은 국내는 물론 세계 바둑계서도 대단한 화제가 됐다,
시나닷컴을 비롯한 중국의 바둑 매체들이 '한국 신예들이 정상급 선배들과의 맞대결에서 승리했다'는 소식을 대서특필했다. 그만큼 한국 신예들의 실력에 대해 관심이 높다는 애기다. 국내에서도 13살짜리 초등학생이 천하의 이창호를 이겼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과거 소년 이창호가 바둑황제 조훈현을 꺾었던 일이 연상됐는지 바둑팬 뿐 아니라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큰 화젯거리가 됐다.
이번 영재 정상 대결은 수 년 전부터 이른바 '90후 세대'라 불리는 중국의 신예 강자들이 세계 바둑계를 휩쓸고 있는 상황에서 과연 국내 신예들의 기량이 어느 정도 되나 시험해 보자는 취지에서 마련된 이벤트 대회인데 뜻밖에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둔 셈이다.
최근 몇 년간 한국 바둑은 물밀듯이 몰려오는 중국 신예들의 인해전술에 속수무책이었다. 지난해 비씨카드배를 비롯, 바이링배, 춘란배, 삼성화재배, LG배 등 각종 세계 대회 통합 예선에서 거센 황사돌풍에 휘말려 사상 최악의 참패를 당했다. 그래도 다행히 이세돌을 비롯해 최철한, 원성진, 조한승, 김지석, 백홍석 등 1980년대생의 분전에 힘입어 정상급 대결에서는 중국과 비등한 전과를 올리긴 했다. 그렇지만 랭킹 10위권 밖으로 내려가면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도저히 비교가 안 될 정도였다. 이대로 가면 중국에 금방 추월당할 것이라는 우려가 바둑가에 팽배했던 이유다.
실제로 작년 말 세계 랭킹에서 1위는 이세돌이 차지했지만 구리, 천야오예, 스웨, 퉈자시 등 2위부터 5위까지 모두 중국 기사들이 자리했다. 이어 박정환이 6위, 최철한 7위, 원성진 10위로 10위 안에 한국기사가 4명인데 반해 중국기사는 6명이었다. 그 밑으로 내려가면 차이가 점점 더 벌어진다. 11위부터 20위까지 한국은 김지석(14위), 조한승(17위), 백홍석(18위) 3명뿐인데 중국은 6명이나 된다. 21위부터 30위도 마찬가지로 한국 4명, 중국 6명이었다. 특히 90년 이후 출생자가 한국은 30위 내에 박정환과 김승재(25위) 딱 두 명 뿐인데 반해 중국은 스웨, 퉈자시, 판팅위, 펑리야오, 왕시, 탄샤오, 미위팅, 롄샤오, 종원징, 장웨이제 등 무려 10명이다.
국제 기전 성적을 따져 봐도 역시 마찬가지다. 한국기원 랭킹 위원 배태일 박사 분석에 따르면 지난해 비씨카드배, 삼성화재배, 바이링배, LG배, 춘란배, 응씨배 등 주요 세계 대회 준결승 이상 진출자를 비교하면 한국과 중국이 백중세다. 그러나 8강에서는 19대 27로 밀렸고, 16강에서는 34대 56으로 더 큰 차이가 났다. 또한 중국은 세계대회 8강 진출자 27명 가운데 절반 가량인 13명이 '90후 세대'였는데 반해 한국은 '90후 세대'가 5번 8강에 올랐지만 그 중 박정환이 4번, 나현이 1번으로 박정환을 제외하고는 젊은 기사 중에 세계 정상급 기사가 거의 없다는 사실이 한 눈에 드러났다.
이 같은 현상은 국내 랭킹에서도 똑같이 나타난다. 올 1월 랭킹 10위권 중 8명이 80년대생이고 90년대생은 박정환(2위, 1993년생)과 김승재(9위, 1992년생) 둘 뿐이다. 중국에는 실력이 빨리 느는 나이인 만19세 미만(1994년 이후 출생) 기사들이 자국 랭킹 상위권에 무척 많이 포진하고 있는데 반해 한국은 30위 안에 1995년 이후 출생자가 나현(15위, 1995), 변상일(17위, 1997), 이동훈(23위, 1998) 세 명 뿐이다.
돌이켜 보자. 그동안 이창호를 시작으로 어린 시절부터 잘 훈련된 1980년대생 바둑 영재들이 속속 입단해 70년대생 선배들을 제치고 무더기로 상위권에 진입했고 이를 계기로 한국 바둑의 기량이 비약적으로 발전해 세계바둑계를 오랫동안 석권할 수 있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입단 병목 현상이 심해지면서 상대적으로 10대 초반의 나이 어린 입단자가 줄어들어 한국 바둑의 정체 현상이 가속화하고 있다는 반성이 일었다.
이에 따라 지난해 7월 만14세 이하 바둑 영재를 대상으로 한 제 1회 영재입단대회가 개최돼 신진서와 신민준이 첫 입단, 국내외 바둑계의 관심을 모았다. 이들 모두 입단 전부터 바둑신동으로 널리 소문난 영재들이지만 작년 하반기부터 공식 기전에 출전했기 때문에 아직 대회 경험이 별로 없어 진짜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궁금했는데 다행히 이번 대회를 통해 무한한 성장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창호는 대국을 마친 후 신진서를 "한 판으로 평가하긴 힘들지만 전투 감각이나 모양을 갖추는 능력이 뛰어나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한편 최철한은 신민준에 대해 "지금은 숨만 쉬어도 실력이 느는 시기다. 중요한 승부를 맞이했을 때 반드시 승리를 낚아채는 능력을 키우면 대기사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평했다.
물론 이번 대회는 공식 전적에 포함되지 않는 비공식 대회인데다 단 한 번의 승부 결과를 너무 과대평가 할 필요는 없다. 일부에서는 일종의 지도기 성격이었으므로 선배들이 적당히 봐줬을 거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프로의 성격상 절대 그럴 리는 없다. 다만 선배들이 어린 후배들과의 대결에서 악착 같이 이기려 하지 않았을 가능성은 있다. 실제 바둑 내용을 봐도 이창호나 최철한 모두 중반 무렵까지 확실히 우세했지만 종반 마무리 과정에서 승부에 연연하지 않고 상대의 반격에 의연히 대처하다 깜빡 실수를 범해 역전패를 당했다.
"이번 대국은 승부라기보다 이벤트의 성격이 강하다. 후배들의 실력을 가늠해 보는 시험기라 할 수 있다. 선배들에게 한 판 이겼다고 너무 들뜰 필요가 없다." 변상일과의 대국을 마친 후 이세돌이 밝힌 소감이다. "조용히 자신의 바둑을 돌아보고 다른 사범들의 바둑을 음미하는 습관을 들였으면 좋겠다"고 말한 대목이 기억에 남는다. 그는 "세 사람 모두 지금 당장 중국의 강자들과 겨뤄도 이길 수 있는 실력"이라고 평했다. 그러나 "세 사람이 약간의 스타일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바둑 내용이 비슷하다"며 "자기만의 색깔을 찾았으면 좋겠다"고 일침을 가하기도 했다.
문제의 핵심은 모든 분야를 두루 잘 하는 평범한 모범생이 아니다. 훈현의 속력 행마, 이창호의 끝내기, 유창혁의 공격력 등 자기만의 독특한 색깔을 갖추지 않으면 최고의 자리에 올라설 수 없다는 세계 최강자의 따끔한 충고다.
박영철객원기자 indr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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