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초에 황송한 선물을 받았다. 무려 1,128페이지에 달하는 단행본 한 권과 도합 1,423 페이지에 달하는 두 권의 단행본이 그것이다. 전자는 서울대출판부에서 나온 '한국문학잡지사상사'이고, 후자는 문학과지성사가 펴낸 '한국현대소설사'다. 놀랍게도 이 두 종의 단행본의 저자는 한 사람이다. 서울대 국문과의 조남현 교수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개화기부터 해방 직후까지 출간된 130종의 잡지 1,000여 권을 대상으로 발행인과 발행 사항, 각 호의 수록 글들을 확인하고 그를 통해 한국 문학 잡지의 사상적 계보를 그리고 있는 '한국문학잡지사상사'는 한국문학의 저수원으로서의 잡지의 위상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준 대작이다. '한국현대소설사' 역시 그 방대한 자료의 양에 있어서는 예외가 아니다. 1890년부터 1945년 동안 소설가 154명의 작품 5,000여 편을 집중적으로 분석하고 있는 이 책은 기존 소설사에서 제외되거나 외면당해온 작품들을 구제하고 그들을 새로운 시각에서 재조명하고자 하는 의욕으로 가득차 있다.
이런 책들을 한꺼번에 두 세 권 받아들게 되면, 일단 그 두께에 압도당하게 된다. 생각해보라, 무려 2,500페이지가 넘는다. 제 아무리 컴퓨터가 자료 정리를 수월하게 도와주는 세상이라고 하지만, 일일이 자료를 확인하고 내용을 요약하며 그것들을 입력하고 정리하는 작업은 결코 기계가 대신할 수 없다. 그것은 무조건 사람의 눈과 손, 그 연약한 도구의 사용을 요구한다. 결국 어느 누군가는 이 엄청난 자료를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과 같은 형태의 지식으로 전환시키기 위해 기나긴 시간, 눈과 손을 혹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 결론 앞에서 가슴이 먹먹해지지 않을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 사람이 눈과 손을 혹사하면서 확인하고 있는 식민지 시대 문학 자료들이 얼마나 열악한 인쇄 상태를 자랑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자라면 이 먹먹함은 조금 더 가중될 것이다. 그 사람이 어느덧 눈이 침침해지고, 오래 앉아 있으면 허리가 아파오며, 많은 것을 기억하기보다 더 많은 것을 잊어버리기 시작하는 나이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이 먹먹함은 곧바로 인생에 대한 성찰로 이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조남현 교수는 다음달에 정년퇴임을 하게 된다. 100세 시대를 눈앞에 두고 있는 이 시점에서 대학교수의 65세 정년은 그리 경하할 만한 사건이 아닐 수도 있다. 소위 퇴임식에서의 고별강연이 점차 사라지고 있는 것만 보아도 이러한 추세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든 퇴임이란 말 그대로 현업으로부터 물러나는 것이다. 평생 해오던 일에서 벗어나도 좋다는 사회적 인정 혹은 압박을 우리는 퇴임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그는 물러나기 위해서 벗어나고자 하기는커녕 이토록 기나긴 시간 한 가지 작업에 매달렸다. 1994년 '소설과 사상'에 연재를 시작한 이후 2000년에 1차적으로 연재를 종료한 '한국현대소설사'의 경우, 그 7년 뒤인 2007년부터 다시 원고를 매만진 후 단행본을 상자하기까지 다시 약 5년의 시간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적어도 10여 년 이상의 시간이 소요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밀레니엄을 기준으로 이야기하자면, 한 세기 전에 시작해 새로운 세기도 십여 년도 더 지나서야 비로소 하나의 작업을 완료할 수 있었다는 계산이 나온다.
물러남의 형식을 갖추는데 이런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그의 불행일까, 행복일까. 이렇게 살아야만 하는 삶을 부러워 할 수 있을까? 일찍이 파우스트가 탄식했듯이 이것은 녹색의 삶을 대가로 겨우 획득한 회색의 삶은 아닌가? 모르겠다. 그의 형극의 시간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려온다. 그러나 다른 것은 몰라도 하나는 알 수 있을 것 같다. 이 황송한 선물은 후학들에게는 한줄기 등불과 같다는 것을. 조남현 교수는 단행본 상자와 관련된 신문 인터뷰 말미에서 당신의 스승이신 전광용, 정한모 선생님이 그립다고 했다. 나도 나의 스승이 그립다. 그는 나의 스승이다.
문학평론가
신수정 명지대 문예창작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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