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화가 이호신(56)은 20여년 전국 방방곡곡의 이름난 사찰과 산 풍경, 거기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화폭에 담아왔다. 그것도 대웅전이라든가, 보물급 탑이라든가 사찰을 기념할만한 건축물을 부각한 것이 아니라 자연에 둘러싸인 절 전체 모습을 사실적인 진경산수 기법으로 그려왔다.
이런 작업을 하는 화가는 많지 않다. 그림 한 장 그려내는데 손놀림보다 발품을 훨씬 더 팔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 전에 땅과 자연, 거기에 녹아 들어 살고 있는 사람에 대한 애정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이호신 작가가 지금까지 전국을 누비며 해온 작업 가운데 사찰과 지리산 그림 290여점을 골라 (다빈치 발행)이라는 두 권의 책을 냈다. 전통제본으로 그림의 멋을 잘 살린 멋스런 화첩이다.
"자연과 문화와 역사가 한데 담겼다"며 절을 좋아하고 산을 사랑한 그는 3년 전 서울을 떠나 지리산 근처로 혼자 내려갔다. 지리산 최단 등정 코스인 중산리행을 위해 반드시 거쳐가는 경남 산청군 원지마을 근처의 남사예담촌에 마련한 한옥 작업실에서 17일 작가를 만났다. 어떻게 작업을 하는지 설명해달라고 하니 작업실 한켠에서 화첩 한 권을 꺼내와서 펴보여준다. 지리산 대원사 그릴 때의 현장스케치들이다.
"근처 산에 올라가 가람 전체의 배치를 완전하게 파악해 그려봅니다. 경내의 나무도 소나무 보리수 오동나무 회화나무가 다 다른 것을 표시하지요. 뒤에 그림으로 별도로 그려내지는 않지만 주지 스님이나 스님들 얼굴도 그려보고, 그런 식으로 절을 속속들이 파악한 뒤 큰 화면에 그림을 한 번 앉혀 봅니다."
그런 작업을 며칠 걸려 먹고 자면서 해낸다. 보고 느낀 것들은 그때그때 화첩 한 쪽에 다 적어 둔다. 받아둔 명함도 한쪽에 가지런히 정리해서 붙인다. 나중에 작업실에서 본격적인 그림 작업의 토대가 될 이런 밑그림과 습작, 작가의 감상이 담긴 화첩이 수천 권이다. 이런 작업이 튼실하고 그림 구상이 잘 돼 그리 오래 걸리지 않고 작품이 나올 때도 있지만 15년, 20년을 다닌 뒤에야 화폭으로 옮겨지는 절도 있다.
그림과 산문을 곁들인 책도 여러 권 낸 작가는 자신의 작업을 두고 "발로 뛰면 본 장면을 화면으로 옮겨내는 것"이라며 "자연과 인문,사생(寫生)과 사의(寫意)를 함께 담아내려는 노력의 결과물"이라고 말했다. 어떤 평론가가 그를 두고 "보고 그리는 것이 아니라 알고 그린다"고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래서 그의 '운주사 천불천탑'이 영국 대영박물관에, '천축산 불영사'는 국립현대미술관에, '동방의 빛 석굴암 불국사'는 핀란드 주재 한국대사관에 걸렸다.
부석사에서 스케치 하러 나무에 올라갔다가 떨어져 정신을 잃었다 깨어나보니 머리가 피범벅이던 이야기, 선암사에서 독사 만난 일 등을 돌이키며 그는 그 동안 인상에 남는 절을 자연과 곁들여 소개했다. "강을 낀 절은 제천 정방사, 산 속의 절은 대원사, 바다 낀 절은 낙산사, 호수를 낀 절은 포항 오어사, 평지 사찰은 실상사지요."
지난해부터는 이종성 시인, 교사이며 산악사진가인 정장화씨와 함께 지리산을 순례하며 시화첩을 만드는 새로운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함께 2박3일 정도 지리산 여기저기를 다니며 자신이 그린 그림에 시를 곁들여 화첩 한 권을 만드는 방식으로 "최소 3년"은 이어갈 생각이란다.
그는 이런 작업을 통해 "한국 문화의 저력이 약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며 "여리고 소박한 것이 한국미인가요? 고려불화는 얼마나 장엄하고 화려합니까"고 되물었다. 바로 여기 진정한 한류가 있다.
산청=글ㆍ사진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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