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만원 세대가 부러운 연극쟁이들의 현실"세상에 대한 사회적 발언이 우리 극단의 목표 중 하나"팟캐스트 '희곡을 들려줘'편안하게 웃고 떠들고 배우들 일상 모습 고스란히누적 조회수 5만명 육박
보일러가 얼어버린 한겨울 아침, 옥탑방 가난한 세 식구가 추위를 이기는 방법은 옥상에서 미친 듯이 춤을 추는 것이다. 보일러를 녹이려고 애를 쓰다가 영 안 되자 영화감독 지망생인 아들이 구상 중인 시나리오 이야기로 한참 설레발을 치고 나서 말한다. "추워? 그럼 춤을 춰." 또 허튼 소리 하네, 그런 표정도 잠시, 마구 춤을 추는 가족을 보며 관객들은 코끝이 시큰해진다. 아무리 애써도 나아질 기미가 없는 가난 속에서 잠시 희망에 부풀었다가 꺼지기도 하면서, 지지고 볶으며 비틀비틀 일상을 견디는 그들의 모습에 공감과 연민이 교차하는 표정을 지으면서.
연극의 거리인 서울 대학로의 혜화동로터리 연우소극장에서 공연 중인 '달나라 연속극'은 이렇게 끝난다. 추위를 이기려고 춤을 추는 건 궁상이지 전혀 낭만적이지 않다. 연출가 부새롬(37)씨가 설명했다. "세상의 '씨발스러움'에 대해 외쳐보자는 연극이다. 가족 이야기라 자칫 따뜻해 보이는 게 싫었다. 그들을 둘러싼 환경을 드러내고 싶었다."
2011년 8월 8일 창단한 젊은 극단 달나라동백꽃의 창단공연 시리즈 첫 작품이다. 지난해 2월 열흘 정도 짧게 선보인 것이 입소문이 나서 재공연을 하게 됐다. 70여석의 작은 극장에서 배우들이 좋은 앙상블을 보이며 열연 중이다.
이 작품을 쓴 김은성(36)씨는 부씨와 함께 이 극단의 공동대표다. 두 사람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을 다닐 때 만났다. 부씨는 무대디자이너로 활동하다가 2010년 김씨 작품 '찌질이 신파극'을 통해 연출가로 데뷔, 연이어 성공적인 연출력을 보여주며 주목을 받기 시작한 신예연출가다. 김씨도 요즘 가장 주목받는 극작가 중 한 명이다. 연출을 전공하고 극작가로 변신한 그는 지난해 연극협회 선정 한국연극 베스트 7, 평론가협회 선정 한국연극 베스트 3에 꼽힌 '목란언니'를 비롯해 '로풍찬 유랑극장' '뻘' '시동라사' '연변엄마' '순우삼촌' 등으로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씨발스런' 세상에 대한 사회적 발언은 이 극단의 목표 중 하나다. 초대권은 뿌리지 않는다. 연극쟁이 자존심이 상하니까. 수익금은 무조건 N분의 1로 나눈다. 가장 큰 특징은 작가, 연출, 배우, 디자이너라는 역할의 경계를 허물고 모두가 연극창작자로 참여하는 작업을 지향한다는 점이다.
달나라에는 동백꽃이 없다. 달은 황량하다. 마치 텅 빈 무대처럼, 혹은 이 세상처럼. 동백꽃은 싱싱한 꽃송이를 모가지채 부러뜨려 떨어진다. 무대에서 한순간에 발화했다가 사라지는 연극처럼. 달나라동백꽃이라는 극단 이름에 배어 있는 꿈을, 관객들은 밤길을 비추는 달빛 같은 연극으로 만나고 있다.
창단 이후 이 극단이 김은성 작, 부새롬 연출로 내놓은 작품은 '달나라연속극'과 ' 로풍찬 유랑극장', '뻘' 이다. 이 세 편은 각각 테네시 윌리엄스의 '유리 동물원', 류보미르 시모비치의 '쇼팔로비치 유랑극단', 체호프의 '갈매기'를 모티브로 재창작한 것이다. 외국 명작을 가져다가 한국 현실과 역사로 직조해 고전을 능수능란하게 구워 삶은 솜씨로 찬사를 받았다. '달나라연속극'의 옥탑방 일가, 한국전쟁 전후 전라도 보성을 떠도는 유랑극단, 5월 광주의 상흔이 새겨진 1981년 벌교로 자리를 옮긴 체호프가 모두 지금 여기, 우리의 이야기가 되었다.
팟캐스트 '희곡을 들려줘'는 이 극단이 관객을 만나는 또 다른 통로다. 윤영선 박근형 등 국내 주요 작가의 우수 희곡들을 배우들이 낭독극 형식으로 들려주며 이야기도 나눈다. 국내 유일, 세계 최초라는 이 희곡 방송은 2011년 11월 시작해 격주간으로 녹음하는데, 셰익스피어 '햄릿'의 마지막 장이 가장 최근 것으로 올라가 있다. 배우들이 편안하게 웃고 떠들고, 대본 연습하면서 더듬거나 실수하는 모습도 고스란히 보여 듣는 재미가 있다. 누적 조회수가 5만명에 육박한다.
흔히 인생은 연극이고 세상은 무대라고 한다. 이 말대로라면 무대에서 사는 연극은 세상의 꽃이 될 만하지만, 연극쟁이로 사는 건 대부분 여느 세상살이보다 어려운 게 현실이다. 이 극단과 두 대표의 형편도 크게 다르지 않다. 연출 외에 닥치는 대로 무대디자인도 하고 영어 과외도 하며 산다는 부씨가 단원들은 어떻게 사는지 일러준다.
"아우, 88만원! 88만원 세대만 되어도 좋겠네. 다들 연기 교습부터 행사 홍보용 촬영, 커피숍 편의점 아르바이트 등 이것저것 한다. 가장 인기 있는 아르바이트는 의대 인턴들 중간고사 시험에 필요한 환자 연기다. 시간 대비 보수가 높기 때문이다. 신약 임상 실험에 인간 마루타도 한다."
한해 최고의 연극으로 꼽힌 작품을 쓴 작가로서 김씨는 사정이 좀 나은 88만원 세대다. 연극협회가 내는 웹진에 글을 써서 받는 월 40만원과 매년 한 학기 대학 강의로 버는 돈을 합치면 그쯤 된다고 한다.
그렇게 고달픈 연극을 왜 하나. 게다가 문제 투성이인 세상에서 연극은 별 힘도 없어 보이는데.
"무기력하지만, 그래도 한다. 팔리지 않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주류의 드라마에서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이야기가 좋다. 남들 눈치 보지 않아도 되니까. 어차피 돈도 안 되는데, 하고 싶은 것, 맘껏 하련다."(김은성)
"세상의 틈을 벌리는 것, 가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연극이다. 연극이 왜 필요하냐고? 연극이 없다고 생각해보라. 불행하지 않을까. 왜 하느냐보다 하고 싶으니까 한다."(부새롬)
젊은 그들, 패기만만하다. 달나라에 동백꽃 필 때까지, 박박 기어서라도 그들은 미련하게, 우직하게 갈 것이다.
오미환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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