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직장 근처로 생활공간을 옮겼다. 원룸이었지만 혼자 생활하기에 충분한 공간이었다. 멀게나마 산이 보이는 큰 창문이 있어 매력적이었다. 출근하기 전 산을 바라보며 마시는 모닝커피 한 잔이 생활에 활력소 역할을 해주었다. 도심 한복판에서 살면서 산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싶었다. 산을 보는 재미에 푹 빠져 낯선 공간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었다.
이사를 하고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였다. 원룸 주차장은 기둥이 많고 협소해 주차하기가 녹녹치 않았다. 기둥을 보랴 주차된 차들을 보랴 쩔쩔매고 있는데, 누군가 창문을 두드리는 거였다. 그는 웃는 낯으로 말했다. 내가 봐줄 테니 안심하고 주차하라고. 그러고는 손짓으로 주차를 도와주었다. 내가 차에서 내리자 그가 웃으면서 말했다. 운전을 잘 하시네요. 운전을 오래 하셨나 봐요. 그의 말과 웃음이 내 기분을 상하게 했다. 처음 보는 이상한 사람이 나를 놀리는 거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내가 사는 원룸에 소속된 관리인도 입주민도 아니었다. 그의 차가 내 차 옆에 주차된 걸 볼 때마다 그의 존재가 궁금해졌다. 나는 그가 정상인이 아닐 거라고 넘겨짚었다. 출ㆍ퇴근할 때마다 그와 마주쳤다. 그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인사하느라, 몇 군데 식당 손님들의 주차와 빌딩 몇 개의 주차를 담당하느라, 서 있거나 앉아 있을 틈이 없었다. 이리 뛰고 저리 뛰는 게 그의 일과였다. 밥 먹을 시간, 숨 돌릴 여유도 없었다.
눈이 내린 날은 그에게 더없이 바쁜 날이 되었다. 골목의 눈을 고무래로 밀고 쓸어내는 일을 하기 때문이었다. "안녕하세요." 그가 어디선가 나타나 인사를 건넸다. 빌딩의 관리실에서 나오거나 식당의 계단을 내려오면서 아니면 주차를 마친 차문을 열면서 그가 인사를 건넸다. 그가 인사를 건넬 때마다 나는 억지웃음을 웃는 내 표정을 들켰다. 그의 스스럼없는 인사가 부담스러웠고 내가 쌓은 마음의 담이 높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내가 생활하는 원룸은 4층이었다. 산이 보이는 창문 아래 붉은 기와를 얹은 단독주택이 자리하고 있었다. 휴일에는 물고기의 비늘 같은 붉은 기와지붕을 내려다보는 재미 또한 쏠쏠했다. 창문 아래 제법 규모가 큰 연못이 있고, 붉은 비늘을 가진 물고기가 살고 있다고 상상하는 동안, 답답하던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단독주택이 헐리고 있었다. 중장비 엔진소리와 날아드는 먼지 때문에 더 이상 창문을 열 수 없게 되었다. 기초공사가 끝나고 건물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결국엔 원룸의 창문을 통해 보이던 산이 가려지고 말았다. 원룸으로 짓는 건물은 5층 6층 7층까지 올라갔다. 눈이 내릴 때도 스티로폼 가루가 날리는 것 같았다.
그는 모른 척 지나치려는 나에게 번번이 인사를 건넸다. 얼마간은 그가 부담스러워 소심하게 다른 길로 돌아서갈까 고민한 적도 있었지만, 나는 지름길을 버리지 않았다. 몇 달이 지나는 사이 나는 그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는 사람이 되었다. 눈을 치우는 그에게 다가가 "안녕하세요" 라고 인사를 건네고, 메아리처럼 들려오는 "안녕하세요" 라는 그의 인사와 웃음을 선물로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어둠이 걷히기 전부터 들려오는 건물공사 소음 때문에 일찍 일어나는 습관이 들었다. 나는 창문을 열고 산을 바라보는 대신 전축을 틀어놓고 클래식을 듣게 되었다. 얼굴을 씻고 머리를 감고 나서 거울을 본 게 전부였는데 창문턱에 탁상거울을 올려놓았다. 그동안 외면만을 바라보고 살았다. 이제부터라도 내면을 들여다보지 않으면 나를 잃어버릴 것 같은 위기감이 찾아왔다. 나는 탁상거울을 통해 나에게 말을 걸고 대답하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단독자로 살아온 터라 나 자신과 소통하는데도 시간이 걸릴 것임이 확실하다. 하지만 나 자신과도 좋은 친구가 될 수 없다면 타인에게 마음을 열기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클래식에 노랫말을 붙여 불러보는 아침마다 새로운 나를 발견하고 잃어버린 나를 찾아가는 느낌이 들어 행복해졌다.
오늘은 출근하는 길에 그를 만나면, "고마워요"라고 먼저 인사를 건네야겠다.
이윤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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