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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그레 여명, 기지개 켜는 설국의 주목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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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그레 여명, 기지개 켜는 설국의 주목들

입력
2013.01.16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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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속에선 하늘이 좁아져 머리 위 별자리가 줄어든다. 축소된 천공에 박힌 별이 차갑다. 헤드 랜턴의 빛을 따라 길이 나타났다 입김에 지워지길 반복한다. 오전 5시, 영하 19도 맑음. 평일 이른 새벽이지만 산행에 나선 이들이 적지 않다. 아이젠의 쇠날에 찍히는 얼음 소리가 내 것인 줄 알았는데 앞서 가는 사람들의 것이었다. 장군봉까지 1㎞ 가량 남았다는 표지판을 지나친다. 훅-훅-. 거친 숨소리가 숲의 정적에 스며 사라진다.

지난 11일, 태백산에 올라 아침을 맞았다. 온도계 눈금이 바닥에 닿을 듯 짧았지만 바람이 없어, 괴로운 날씨는 아니었다. 태백산은 산을 즐기는 사람들이 겨울 산행지로 첫 손에 꼽는 산 가운데 하나다. 적설량이 많아 유난히 아름다운 눈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해발 1,567m. 하지만 800~900m까지 차도가 닦여 있어 짧은 시간이 백두대간 마루금에 오를 수 있는 산이다. 등산 코스도 비교적 완만하다. 겨울 산이라면 지레 겁부터 집어 먹는 사람이라도 도전할 만하다. 단, 방한복과 아이젠 등 겨울 등산 채비는 단단히 갖춰야 한다.

해발 800m 어름에 차를 세우고 출발한 지 한 시간 남짓. 동남쪽 하늘에 새벽빛이 들기 시작했다. 정상을 목표로 삼은 이들의 걸음이 빨라졌다. 그들을 좇지 않고 둥치 굵은 나무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갔다. 미명 속에 잎을 떨구고 선 고목이 산 것인지 죽은 것인지 구별되지 않았다. 그 거칫한 나뭇가지 사이로 아침이 왔다. 흑색의 하늘을 군청색으로 밀어 올린 뒤, 아침은 등자열매 빛깔로 서서히 얼굴을 드러냈다. 반대편 하늘엔 아직 별이 또렷했다. 하늘을 가득 채운 색의 잔치는 20여분 계속됐다. 그 잔치에 참여한 것만으로도 산행의 보람이 넉넉했다.

해가 오르자 눈을 덮어 쓴 골과 마루, 마른 몸으로 겨울을 버티고 있는 나무들이 윤곽을 드러냈다. 태백산은 습기 먹은 동해의 바람 덕에 아름다운 상고대를 자주 볼 수 있는 곳이다. 이날은 충분히 추웠지만 습도가 낮아 상고대는 피지 않았다. 건조한 날도 바람이 세게 불어 바닥의 눈을 쓸어 올리면 눈꽃이 피기도 한다. 안개 속에 눈꽃 핀 날 태백산에 올라 있으면 온 세상이 통째로 얼어붙은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된다. 온갖 나무가 순백색 바늘잎을 피우는 아찔한 설경은 2월까지 계속된다.

생사의 표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침묵하고 있던 나무는 주목이었다. 태백산은 보호수종으로 지정된 주목이 군락을 이루고 있는 곳이다. 이 나무는 수명이 매우 길다. 생장 속도도 느리다. 사람이 키울라치면 평생을 기다려야 둥치의 지름이 겨우 20~30㎝가 된다. 그래서 주목은 다른 나무의 그늘에 가려 100년, 200년을 살아야 한다. 하지만 마침내 살아서 그늘을 벗어나고야 마는 질긴 나무다. 춥고 바람이 강한 곳에서 살지만 둥치는 곧고 또 굵직하다. 옛 사람들은 검질긴 생명력과 붉은 빛, 은은한 향을 높게 사 주목으로 홀(신하가 왕을 만날 때 손에 쥐는 것)을 깎고 관을 짰다.

태백산 주목은 대개 속이 빈 부후목(腐朽木)이다. 속을 다 비워내고도 주목은 천 년을 산다. 비릿한 오욕칠정으로 꽉 찬 인간 앞에서 나무의 자태는 오연해 보였다. 나무는 속 없이도 잘 산다. 유일사에서 장군봉 오르는 길, 등산로에서 조금 벗어난 커다란 주목 속으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오래 전 썩어 파여진 나무의 몸뚱이 빈 곳으로 파란 하늘이 보였다. 나이테가 있어야 할 둥치에 허공이 들어 있는 것이어서, 이 나무에게 천 년은 기록될 시간이 아니라 그저 흘러가버릴 바람과 같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백산은 에 단군의 아버지인 환웅이 하늘에서 내려와 터를 잡은 곳으로 기록돼 있다. 일연이 몽골군의 말발굽을 피해 숨어서 를 쓴 건 13세기의 일. 3,500여년 저쪽의 신시(神市)의 기억을 글로 남긴 까닭을 일연은 에 밝히지 않았다. 여하튼 그로 인해 태백산은 민족의 영산 대접을 받는다. 태백산엔 제단이 셋 있다. 그 중 정상에 위치한 천제단은 적석으로 쌓은 신역(神域)으로 신라 때부터 제사를 지낸 기록이 남아 있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백두대간의 운해는 눈꽃과 함께 겨울 태백산을 대표하는 이미지다. 일망무제. 신시가 진짜 이곳이라면 환웅의 시대는 분명 거대한 스케일을 지녔을 것이다.

태백산엔 토박이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마을이 거의 없다. 일찍이 군사지역과 도립공원으로 묶였고 산자락 마을들도 석탄 산업이 한창일 때 옛모습을 잃었다. 하산길에 들러볼 만한 마을이 없는 건 아무래도 아쉬운 일. 당골 코스로 내려와 발에 감았던 아이젠을 푸는데 이른 시간임에도 주변이 떠들썩했다. 화전민들 살던 이곳은 오래 전 관광지가 됐다. 지금은 25일 개막할 눈꽃 축제 준비로 분주했다. 단군을 모신 성전과 무속인들의 수련터도 이 부근에 흩어져 있었는데, 그 집들의 모습도 왠지 부산해 보였다. 산 위에 두고 온 속을 비워낸 나무의 잔영이 길게 뇌리에 남아 있었다.

여행수첩

●태백산 일출산행의 출발점은 유일사 코스가 좋다. 입구에서 출발해 장군봉 거쳐 천제단까지 왕복하는 코스(4㎞)가 4시간 정도 소요된다. 당골광장에서 출발해 망경사를 거치는 코스(왕복 4.4㎞, 5시간), 당골광장에서 문수봉, 무쇠봉을 거치는 코스 (왕복 7㎞, 6시간) 등도 천제단에서 이어져 있다. 주목 군락지는 유일사에서 장군봉 가는 길에 있다. 입장료 2,000원. 태백산도립공원 관리사무소 (033)550-2741 ●태백시 장성동에 안전체험을 주제로 한 테마파크 '365 세이프타운'이 최근 문을 열었다. 산불 진화, 지진 대피 등을 체험하는 청소년안전체험관, 현직 소방관으로부터 특수 진압 훈련을 배우는 소방학교 등이 있다. 입장권 어른 1만5,000원, 중ㆍ고생 1만원, 어린이 8,000원. (033)550-3101

유상호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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