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딜(new deal)은 원래 새 출발, 대변혁, 또 한 번의 기회 등을 뜻한다. 이게 고유명사(The New Deal)가 된 것은 대공황이 휩쓴 1933년 루스벨트 미 대통령이 자유시장경제 노선을 수정한 일련의 혁신정책을 시행하면서다. 루스벨트는 애초 선거 유세에서도 파탄에 이른 경제의 뉴딜을 공약했으나 그 내용은 모호했다. 경제학자 스튜어트 체이스가 갓 출간한 저서 의 제목을 그냥 정책 구호로 빌려 쓴 것처럼 보였다.
루스벨트는 빈곤과 실업 구제를 통한 경제 안정(Relief)과 부흥(Recovery), 개혁(Reform)의 '3R'을 정책 목표로 제시했다. 구체적 정책 내용은 체이스가 공황 극복을 위해 제시한 것과 크게 달랐다. 그런데도 뉴딜을 구호로 내세운 것은 말 자체가 지닌 호소력, 매력을 이용하려는 의도였다.
체이스는 뉴딜을 "경제 구조를 혁신적으로 개편하되, 과거와의 전면 단절은 피하는 것"이라고 정리했다. 실제로 뉴딜은 이를테면 기업을 팔고 사는 협상과 같은 상업적 거래의 뉘앙스를 지닌다. 어느 한 쪽에 불리할 수도 있는 거래, 딜(Deal)에 뉴(new)를 덧붙임으로써 공정하고 매력적인 거래라는 느낌을 준다. 루스벨트는 이를 통해 개혁 정책이 반(反)기업, 반자본적이지 않다는 메시지를 던져 새로운 정책에 동참해 함께 기회를 누릴 것을 제안하는 효과를 얻었다.
이런 메타포(metaphor), 은유적 구호는 선거전에서의 압도적 지지는 물론이고 숱한 개혁 입법에 의회 승인을 얻는 데 큰 도움이 됐다. 반기업적으로 비치는 규제 입법조차 시장 경쟁과 활력에 요긴한 수단으로 받아들여졌다. 이처럼 정치 또는 정책 메타포는 그저 듣기 좋은 수사에 그치지 않고 정치와 정책의 성패를 가르는 상징적 수단이 될 수 있다.
박근혜 당선인은 아직 뉴딜과 같은 매력적 메타포를 내놓지 못한 느낌이다. 오래 전 즐겨 쓴 '애국애족'은 시대에 뒤진 구호로 들렸다. 대선에 앞서 자주 언급한 '안거낙업(安居樂業)'도 비슷하다. 대선 때의 '경제 민주화'나 '국민 행복'은 개념이 모호하거나 너무 흔한 말로 들린다. 그래선지 박정희 대통령 시절의 성공 신화를 이끈 '잘 살아보세'를 리바이벌하는 듯 했으나 창의적이지 못하고 감동도 별로 없다.
민주화 이후 역대 정부는 대개 그럴듯한 메타포를 동원, 나름대로 성공을 거뒀다. 노태우의 보통사람, YS의 문민정부, DJ의 국민의 정부, 노무현의 참여정부는 모두 창의적인 메타포이자 선전 구호였다. MB 정부는 실용을 앞세웠으나 인상 깊은 메타포로 정착하지 못했다. 성공적 메타포는 창의적 정책 노선을 상징할 뿐 아니라 국가와 사회가 나아갈 미래의 목표와 희망을 제시해야 한다.
정치적 메타포는 그저 듣기 좋은 구호에 그치지 않는다. 현대 신경과학의 연구에 따르면, 훌륭한 메타포는 함축적 의미와 연관된 뇌(腦) 여러 부위를 자극하고 활성화한다. 이를 통해 개인에게 잠재한 창의성과 능력을 발휘하도록 한다. 루스벨트의 뉴딜 구호가 좌절하고 불안한 국민에게 새 희망과 의욕을 불러일으킨 것은 그런 과학적 매커니즘이 작동한 결과이다.
박근혜 당선인은 1980년 이후 격동을 거듭한 30여 년의 과도기를 발전적으로 청산, 진정한 21세기의 새로운 시대를 여는 책임을 짊어지고 있다. 그 스스로 '시대 교체'를 표방한 것은 이런 운명적 과제를 깊이 인식한 결과일 것으로 믿고 싶다. 다만 그 '시대 교체'가 지향하는 목표가 분명치 않고, 메타포로서의 상징성도 뚜렷하지 않다. 그래선지 아직 박근혜 정부를 한 마디로 상징하는 구호나 별칭을 제시하지 않고 있다. '준비된 여성 대통령'이라는 선거용 구호를 대신할 정권의 메타포를 심사숙고 해 제시할 필요가 있다. 하다못해 '혁신 정부'라는 진부한 구호라도 내놓을 만하다.
강병태 논설고문 bt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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