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고(故) 손기정(1912~2002)은 부상으로 청동투구를 받기로 되어 있었다. 고대 그리스 올림피아제전에서 승리를 기원하고, 신에게 감사의 뜻으로 바치기 위해 2,600년 전 코린트시대에 제작한 것이었다.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에게 그리스가 실재 유물을 준 것은 1900년 파리 올림픽부터 유물유출금지령이 내려진 2차 세계대전 때까지였다. 베를린에서는 그리스의 브라디니(Vradyni)신문사가 이 투구를 선물로 내놓았다.
■ 손기정은 몰랐고, 조선청년의 우승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던 일본도 소극적이어서 그의 이름이 새겨진 청동투구는 40년 동안 베를린의 한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었다. 앨범을 정리하다 우연히 이 사실을 알게 된 손기정은 10년의 노력 끝에 1986년에야 돌려받았다. 그러자 정부는 이듬해 곧바로 서구유물로는 처음으로 보물(제904호)로 지정했고, 1994년 손기정은 "이 투구는 나의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것'이라며 국가에 기증해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했다.
■ 2,600년 전의 것이긴 하지만 마라톤 우승 부상인 외국유물을 왜 보물로까지 지정했는지 모를 국민은 없다. 역사적 의미와 배경이 남다르기 때문이다. 한 개인의 영광이나 스포츠사의 기념을 넘어 암울한 일제강점기에 민족의 자긍심을 높인 상징물이다. 손기정이 42.195㎞를 숨이 끊어져라 눈물로 달려 받은 그 투구에는 나라 잃은 울분과 조국 독립에 대한 간절한 염원이 담겨있다. 바로 그 자긍심과 염원이야말로 우리 민족이 소중히 간직해야 할 보물이다.
■ 지난 12월 27일 문을 연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경제발전의 상징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라디오, TV수상기, 자동차, 반도체 등을 전시하고 있다. 문화재청이 이것들과 함께 1998년 US여자오픈에서의 박세리 골프채, 88올림픽 굴렁쇠, 김연아의 스케이트를'예비문화재'로 지정할 모양이다. 시대적 의미를 감안하면 억지는 아니다. 문화재도 시대에 따라 변해야 하고, 꼭'50년 후'를 고집할 이유도 없다. 다만 무엇이 됐건 국민의 동의를 얻는 것만은 잊지 말아야 한다.
이대현 논설위원 leed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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