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중구 남산 자락에 있는 장충리틀야구장. 지난 3일 오후 4시50분쯤 덕아웃 의자에 담요를 덮고 웅크린 상태로 누워있는 한 남자가 시무식을 마치고 나오던 한국리틀야구연맹 관계자 김모(46)씨에 의해 발견됐다. 영하 10도의 날씨에 외투도 걸치지 않은 남자는 이미 운명을 달리한 상태였다. 한겨울 야구장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한 이 남자는 전직 야구선수 이영완(64)씨. 1960년대 후반 인기 절정의 고교야구에서 '초고교급 타자'로 이름을 날리던 선수였다.
11일 서울 중부경찰서에 따르면 이씨는 리틀야구장 근처에서 7년 넘게 노숙을 해왔다. 경찰 관계자는 "이씨가 밤새 내린 눈을 피해 반지하에 있는 선수대기실에 들어가 잠을 자다 동사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초라하게 죽음을 맞은 이씨는 1960년대 야구 명문이었던 선린상고(현 선린인터넷고등학교) 4번 타자로 활약하며 '휘두르기만 하면 장타'라는 별명을 얻은 선수였다. 1967년 4월 전국대회에서 홈런상과 미기상을 받기도 했다. 이씨의 고교 1년 후배인 유남호 전 기아타이거즈 감독은 "파워가 뛰어나고 발이 빨라 단연 눈에 띄던 선배였다"며 "고교 졸업과 동시에 제일은행 실업팀에 입단할 만큼 출중해 늘 선망의 대상이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어린 나이에 실업팀에서 쟁쟁한 선배들과 겨뤄야 했던 이씨는 팀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당시 팀 동료였던 김우열 두산베어스 코치는 "입단 후 경기에 출전하지 못하는 날이 많아지더니 야구를 그만뒀다"며 "사업 실패로 형편이 어렵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설마 노숙자로 살고 있을 줄 몰랐다"며 안타까워했다.
결혼 후 아들과 딸을 두고 단란한 네 식구의 가장으로 살아가던 이씨는 지방에서 운영하던 음식점이 실패하면서 삶도 어긋나기 시작했다. 활달하고 자신감 넘치던 성격은 폐쇄적이고 거칠게 변했고, 10여년 전 이혼한 후에는 가족과 연락을 끊고 술에 의존했다. 2005년 리틀야구대회 심판으로 잠시 야구계로 돌아오기도 했지만, 다시 술에 의존하며 거리를 떠돌다 자신의 꿈이었던 야구장에서 결국 인생을 마감했다.
경찰 관계자는 "이씨는 술에 취해 '왕년에 유명한 야구선수였다'고 말하면서 야구장과 공원 일대에서 난동을 부려 신고가 들어온 적도 많았다"고 말했다.
손효숙기자 shs@hk.co.kr
김민호기자 kimon87@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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