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1980년대 후반부터 중국을 드나들면서 가장 가보고 싶었던 지역이 흑룡강성 하얼빈이었다. 그 곳의 하얼빈역에서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현장을 꼭 보고 싶었다. 하지만 동북3성 가운데서도 지역적으로 가장 외진데다 여행 인프라도 잘 개발되어 있지 않아서인지, 공무나 학회 일로 중국으로 갈 때마다 방문 일정을 잡을 수가 없었다. 이번 겨울, 그것도 가장 추운 시기를 택하여 하얼빈을 다녀왔다.
정말 천신만고 끝에 하얼빈역 플랫폼의 그 자리에 도달할 수 있었다. 혹한의 기온 속에 정성을 다해 안내해준 지인이 아니었더라면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이었다. 1909년 의거 당시의 하얼빈역은 초라한 시골 역사의 모습을 하고 있었을 터이지만, 지금은 인구 1,000만 명의 크게 번화한 도회에 역을 통한 이동 인구도 사람에 밀려 다녀야 할 만큼 많았다. 중국의 열차 탑승 시스템은 신분증을 확인한 다음에 발권이 가능하고 엑스레이 보안검사대와 세 차례의 검표 관문을 거쳐야 플랫폼으로 나갈 수가 있다.
뿐만 아니다. 출구로 나올 때도 여권과 차표를 보여주어야 했다. 역사적 유적지를 보러 왔다는 말을 꺼낼 형편조차 되지 않았고 더군다나 그 과거의 역사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할 수 없이 가까운 곳으로 가는 차표와 배웅하는 간이표를 사서 여러 차례 검문을 거쳐 안으로 들어갔다. 언 손을 다독여가며 몇 번씩 지상 및 지하도를 오간 다음에 간신히 현장을 찾았다. 그것도 마침 그 자리 가까운 곳의 경비원 한 사람이 위치를 알고 손짓해 주었기에 가능했다.
아무것도 없었다. 간략한 입간판은 고사하고 흔한 안내 글 한 줄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플랫폼 바닥에 삼각형 타일이 입혀져 저격자의 위치와 저격 방향을, 그로부터 5m 정도의 거리에 사각형 타일이 있어 표적이 섰던 위치를 암시하고 있었다. 참으로 허망했다. 중국이라는 나라가 자국의 영토 안에 다른 나라의 영웅적 인물을 기리는 데 인색하다고는 하나, 이는 우리의 국격이나 외교적 역량과 관련된 일이라 여겨졌다.
상하이 홍구공원에는 그래도 윤봉길 의사의 행적을 살펴볼 수 있는 기념 시설들이 확보되어 있어서 방문객들의 눈길을 붙든다. 그런데 중국의 중앙정부이든 하얼빈시이든 이 자리에는 아무런 노력도 시도도 없었던 것인지, 내내 가슴이 쓰라렸다. 안중근 의사의 순국정신과 희생이 우리 역사에서 발하는 찬연한 광휘에 비추어보면, 이는 너무도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광복 이후의 우리 정부는 당신의 유해를 조국으로 이장해 달라는 유지를 받들지도 못했고, 지금 의사의 유해는 유실되어 찾을 길도 없다. 그 자손들은 정부의 지원이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어렵게 살았다.
안 의사가 1909년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여 그 자리에서 즉사하게 한 날짜는 10월26일이다. 이토는 일본 근대화 개혁인 명치유신 때 권좌에 오른 인물로, 조선합병을 책임진 천황특파 전권대사였다. 그는 고종을 위협하고 대신들을 협박하여 강제로 을사조약을 체결한 주역이다. 이토를 처단한 것은 세계 각국에 대한제국의 존재와 민족적 항일 저항의지를 천명한 쾌거였다.
이토는 합병에 유리한 국제적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하얼빈을 찾아온 참이었다. 안 의사는 저격 후 자수를 했고, 자신은 한국의군의 참모중장 자격으로 조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위해서 전쟁을 수행한 것이니 만국공법, 곧 국제법에 따라 전시포로로 처리할 것을 요구했다. 1910년 2월 14일 중국 여순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는데, 끝까지 의연한 자세를 허물지 않았다. 이토를 두고 명성왕후 시해와 고종황제 폐위 등 15가지 죄상을 주장한 것도 놀라운 기개가 아닐 수 없었다.
국내에 안중근의사숭모회나 안중근기념사업회 등이 결성되어 활동하고 있고, 북한에서는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라는 작품의 공연과 영화화도 이루어졌다. 하얼빈역의 유적지화와 기림을 위해서 북한과 협력하는 방안을 찾아볼 수도 있을 것이다. 올해 2월14일에는 제발, 상술이 앞선 밸런타인데이의 헛바람에 묻히지 않고 안 의사의 사형 선고 일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김종회 경희대 국문과 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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