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6월 일본 요코하마시(市) 웹사이트에 협박 글이 올라왔다. "여름 내에 초등학교를 공격할 것"이라는 경고였다. 이후 몇 달간 비슷한 내용의 협박이 여러 차례 올라왔다. 심지어 "일왕의 증손자를 죽일 것"이라는 글까지 발견되자 일본은 발칵 뒤집혔다.
경찰은 수사력을 집중해 발 빠르게 4명의 용의자를 체포했다. 이들 중 19세 고교생 등 2명은 재판 전 구류상태에서 범행을 자백했다. 언뜻 경찰의 승리인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10월 오치아이 요지 변호사가 실제 범인의 메일을 받으면서 상황은 바뀌었다. 범인은 컴퓨터 원격조작 바이러스를 이용해 다른 사람들의 컴퓨터에서 협박 글을 올린 범행수법을 설명하며 "경찰과 검찰에 대한 혐오감 때문에 범행을 저질렀다"고 주장했다. 용의자들의 자백은 거짓이었고 경찰은 허탕을 친 것으로 드러났다. 이후 범인은 아직 잡히지 않았다.
이 사건 이후 일본 사회에서는 "용의자들에게 어떤 압력을 넣었기에 그들이 저지르지도 않은 죄를 인정했냐"며 경찰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일본에서는 기소 후 유죄 선고율이 무려 99%에 달하기 때문에 실제 범인이 제때 나타나지 않았다면 용의자들은 꼼짝없이 죄를 뒤집어 쓸 뻔 했다. 자백한 고교생의 아버지는 "아들이 자백을 선택한 심정을 헤아리면 참을 수가 없다"며 경찰 수사를 비난했다.
BBC방송은 최근 이런 소동이 "자백에 집착하는 일본 사법체계의 고질적 문제를 보여준다"고 분석했다. 제프 킹스톤 템플대 교수는 "일본의 높은 유죄 선고율은 용의자 자백을 결정적 근거로 삼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지적했다. 그러다 보니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가혹한 심문도 용인된다는 것이다.
강도살인죄로 29년간 복역한 후 지난해 재심에서 무죄 평결을 받은 사쿠라이 쇼지의 예가 대표적이다. 사쿠라이는 "체포됐을 때 나는 갓 20세가 된 어린 나이였다"며 "5일간 밤낮으로 심문받다 보니 버틸 힘이 없어 거짓 자백을 하고 말았다"고 털어놨다. 그는 복역 기간 하루당 1만2,500엔(약 15만원) 상당의 보상을 받았지만 국가를 상대로 더 많은 보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진행 중이다. 사쿠라이는 "돈 때문이 아니다"며 "경찰과 검찰이 무고한 사람들을 감옥에 잡아넣는 사법체계를 바꾸고 싶다"고 말했다.
13년간 검사로 재직하다 심문 중 용의자를 죽이겠다고 협박하는 바람에 실직한 이치카와 히로시는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물불 안 가리는 검찰 분위기를 전한다. 이치카와는 "상사가 책상 밑으로 용의자의 정강이 차는 법을 가르치는 등 모두가 용의자를 험하게 다루기 때문에 내가 한 협박이 특이한 것은 아니다"라고 항변했다. 그는 "8시간 심문 후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용의자에게 내가 만든 진술서에 서명하도록 강요한 적이 있다"고 고백했다.
25년간 경찰로 일한 고바야시 요시키는 "일본 경찰이 자백에 집착하는 이유는 수사력이 제한돼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일본 경찰에게는 사법거래 위장수사 도청 등 다양한 수사기법이 허용되지 않는다"며 "진실을 밝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자백을 받아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전통적으로 공권력에 맞서는 것을 금기시하는 일본 문화도 거짓 자백의 한 원인이다. BBC방송은 "일본인들은 용의자로 의심받는 데 대한 수치심이 강하고, 자신 때문에 가족의 체면이 깎일 것을 두려워해서 쉽게 자백한다"고 지적했다. 경찰과 검찰이 이를 노려 가족의 자백 권유를 유도하는 경우도 많다.
박우진기자 panoram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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