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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당했던 지성의 도열 생존에 치이고 세속에 밀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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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당했던 지성의 도열 생존에 치이고 세속에 밀리고…

입력
2013.01.11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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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셀러·스테디셀러… 영광의 자리를 거머 쥔 책도한 귀퉁이 조용히 빛바래진 책도 저마다의 위엄·가치 뽐내던 곳승부와 서열의 냉혹한 현실앞 그들의 자존심도 주눅들진 않을까

갓 나온 책들은 저마다의 자부로 당당하다. 제각기 휘장(徽章)처럼 두른 화려한 상찬의 띠지나 표짓말 때문만은 아니다. 살벌한 경쟁을 뚫고 모인 대학 신입생들의 표정처럼, 어색한 긴장이 다 감추지 못하는 패기와 자신감이 거기 있다. 위엄이 느껴지는 책들도 있다. 우쭐대지 않으면서도 담담히 거만한, 이를테면 오연(傲然)한 멋. 잘 다려 입은 외투처럼 어느 한 곳 눌리거나 주름진 곳 없이 팽팽한 표면에서, 손이라도 밸 듯 빈틈없이 각진 몸매에서, 낱장의 측선들이 포개져서 이룬 뽀얗게 순결한 몸체가 뿜어내는 모호하게 유혹적인 존재감에서 새 책의 위엄은 배어 나온다.

내용의 기품에 걸맞게 하드커버로 멋을 낸 양장본이기라도 하다면 낱장들의 실루엣이 그려내는 눈썹달 같은 곡선은 그 자체로 묘한 페티시즘을 자극할지도 모른다. 사이사이 거뭇거뭇 내비치는 잉크 자국들은 또 그것대로 책의 부피감을 고양시키며 야릇한 호기심을 불러 일으킬 것이다. 조심스레 휘어 쥘 때의 탄력과 차르르~ 낱장을 넘길 때 감지되는 묘한 찰기는 종이들이 기계 칼의 육중한 하중을 버티느라 쏟았던 저항의 힘을 아직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새 책들만이 지니는 멋과 위엄은 그런 사소한 감각에서도 느껴진다. 아직 누구의 손도 타지 않은 새 책들만이 지니는 은밀한 매력. 서점은 그런 책들이 세상에 처음 제 모습을 내보이는 데뷔 무대다.

서점의 신간 코너는 공간의 비교적 돋보이는 곳에 자리잡기 마련이고, 또 독자들이 가장 붐비는 공간 가운데 한 곳이다. 그만큼 신진대사도 빠르다. 날 때부터 존귀한 대접을 받는 책도 있고, 소문 없이 나고 지는 비운의 책들도 있다. 새 책의 수효에 비하면 그 공간은 늘 인색해서, 아예 그 공간에 서보지도 못하는 책들도 있고, 며칠도 안 돼 일반 서가로 쫓겨나는 책들도 있다.

시장가치가 입증된 책들은 베스트셀러 서가, 요컨대 주인공들의 무대로 자리를 옮긴다. 그 서가는 서점에서 가장 화려한 공간이지만 신간코너보다 더 살벌한 승부의 공간, 차가운 서열의 공간이어서 매주 순위에 따라 자리가 바뀌고, 멤버가 교체된다. 그 공간에서 오래 버티는 책들은 스테디셀러 서가라는 가장 영예로운 공간에 별도의 자리를 얻기도 한다.

중도 탈락한 책들은 종류와 장르별로 분류된 일반 서가에서 오래된 책들 사이에 섞여 늙어간다. 흔히 말하듯 책들도 저마다의 운명이라는 게 있어서 드물게는 어떤 기적적인 계기로 팔자(八字)가 일변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그렇게 잊혀져 간다. 매주 수십 수백 권씩 쏟아지는 책들 사이에서 그나마도 서점 한 귀퉁이에 제 자리를 확보할 수 있다면 다행스러운 경우다. 색이 바래기도 전에 절판되는 책들, 큰 도서관에나 가야 볼 수 있는 책들이 훨씬 많고, 낱장들의 찰진 숫기를 그대로 간직한 채 도서관에서조차 쫓겨나 오직 저자(나 편집자)의 기억에만 남은 책들도 숱하다.

모든 존재가 상품화하는 시대에 책의 운명이라고 유별날 건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책은 여느 상품이 누릴 수 없는 정신성으로 하여, 앞서 언급한 것처럼 모종의 위엄을 지닌다. 아니 그런 느낌을 어렵지 않게 투사하게도 된다. 상대적이긴 하겠지만, 책은 공급자(우선은 저자)의 정신성을 가장 직설적인 형태로 담는 상품이고, 소비자의 정신성에 가장 직접적으로 또 일상적으로 개입하는 대표적인 상품이다. 직업, 지위, 권력 등 세속적 가치들이 종당에는 축적한 부의 크기나 가능성으로 환원되는 경향이 노골화하고 있지만, 그 어떤 세속의 가치도 넘볼 수 없는 상징적 가치, 상징 권력의 가능성을 책은 지닌다. 그런 경향은 책이 자본주의적 기획의 가장 변방에 섬으로써 누릴 수 있는 저항적 가치, 예외적 가치일 것이다.

물론 책도 상품이어서 어떤 한 권의 책이 필자의 세속 권력을 표나게 강화해주는 예도 드물지 않다. 하지만 좋은 책이 늘 좋은 상품으로 평가 받지는 못한다. 아니 상품으로서의 가치가 책이 지닌 본연의 가치를 자주 배신해왔고, 심지어 맞서는 경향마저 내보이기도 한다. 가치에 대한 저 시장의 빚은 대개 긴 시차(時差)를 두고 탕감되곤 하지만, 어둡고 게으른 눈들이 끝내 살피지 못해 영영 사라지는 책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서점의 서가는 그런 보석 같은 책들이 처음 지녔던 저마다의 자존감으로 저 혼자서 빛나며 버티고 있는 공간이다. 오연한 위엄은 어쩌면 첫 대면의 순간에 감지되는 그런 기미에서 비롯되는 것일지 모른다. 어떤 가혹한 운명에도 담담히 당당히 서겠다는, 어떤 새 책의 드문 각오 같은 것.

대형 서점의 일반 서가, 특히 인기 없는 책들은 전면(前面)과 중심의 기획 공간(신간 인기도서 서가나 매대)의 배후에서 주로 벽을 따라 배열된다. 철학 기술 예술 의학 종교… 도서관이 서지체계에 따라 평등하게 안배된 익명의 공간이라면 서점은 중심 변방 할 것 없이 책의 상품가치에 따라 정교하게 차별화한 서열의 공간, 동적인 공간이다. 기획 공간이 전시ㆍ경쟁의 공간이라면 후미진 자리로 갈수록 구색용 창고처럼 좀 삭막하지만 그래서 평화롭다. 진종일 수천 명의 손님이 서점을 들고나는 동안 단 한 사람의 눈길도 얻지 못할 때도 허다하다. 그렇다고 인적이 끊기는 경우는 거의 없다. 흥미 있는 책을 골라 몇 시간씩 퍼지르고 앉아 읽고 가는 이들 중에는 그런 후미의 고요를 찾아오는 이들이 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이들은 서가에 기댄 채 다리까지 쭉 펴놓고, 천장의 폐쇄회로 카메라가 쳐다보건 말건 느긋하게 책에 탐닉한다.

인터넷 서점들의 할인 공세에 타격을 받는 것은 동네의 작은 서점만은 아니어서 버젓한 자리에 수천 평씩 공간을 마련한 대형 서점들도 조금씩 책의 자리를 줄여가는 형국이다. 학용품이나 사무용품점, 간단한 선물용품점들이 들어서고 한 켠에 작은 카페가 들어서더니 점차 장신구 음식 의류 화장품 편의점까지 자리를 차지한 곳도 있다. 그 추세는 가파르고 또 이질적이어서, 서점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부인하는 정도가 공간 경제성 즉 서점 운영의 안정성에 기여하는 것 같다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동네의 몇 안 남은 작은 서점들 가운데에는 이미 서점으로서의 정체성을 노골적으로(?) 외면함으로써 근근이 명맥을 유지하는 곳들이 있다. 지역 주민들의 사랑방 노릇을 자임하는 곳도 있고, 카페처럼 작은 골방을 마련해놓고 토론 공간 등으로 제공하는 곳도 있다. 예술가나 지역 명사들을 초빙해 강연회나 낭독회, 아담한 공연을 주선하는 곳도 있다. 그런 서점의 주인들은 또 대개 책을 아끼고 좋아하는 이들이어서, 시장의 평가에 아랑곳 않고 나름의 선택 기준에 따라 양질의 책을 골라 좁은 서가를 채워두기도 한다. 그리고는 마치 옷 가게의 점원이 옷감의 품질을 설명하고 맵시를 조언해주듯, 책에 대한 간단한 평가나 독서컨설팅을 제공한다. 커피나 차 같은 음료수와 간단한 요깃거리를 판매하기도 하는데, 얼핏 봐서는 주업인 책 매출보다 그런 부대매출로 서점 재정을 지탱하는 듯도 하다. 그런 작고 개성 있는 서점들은 잠깐씩 누리는 손님의 입장에서 보자면 멋있고 낭만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주인의 입장에서는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 했던 가장 현실적인 대안일지 모른다. 그 때의 작은 동네 서점은, 대형 서점들이 서가의 해체를 통해 역설적으로 서점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듯, 상인이지만 최대한 상인 같지 않고 싶고 또 그래야 상인으로 버틸 수 있는 서점 주인의 저 딜레마와, 상품이지만 시장의 평가에 연연해하지 않겠다는 어떤 책들의 처절한 자존심이 아슬아슬하게 공생하는 공간이 된다. 위축돼가는 서점의 미래 앞에 새 책들의 오연한 자존심도 조금씩 주눅들어갈지 모른다. 그와 함께, 아마도 우리의 정신성 역시 조금씩 비루해져 갈 것이다.

선임기자 proos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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