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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예순둘에 진보주의자로 변신한 '낙태 허용 판사' 블랙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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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예순둘에 진보주의자로 변신한 '낙태 허용 판사' 블랙먼

입력
2013.01.11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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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에 진보적이지 않다면 가슴이 없는 사람, 마흔 살에 보수적이지 않다면 머리가 없는 사람이다."

윈스턴 처칠의 말처럼 사람은 나이를 먹을수록 보수적으로 변하게 마련이다. 평생을 쌓아 온 부와 지위를 지키려니 변화를 두려워하고, 굳어버린 신념과 가치관 때문에 새로운 것을 쉬이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러나 여기 처칠의 격언과 완전히 반대의 인생을 살았던 한 사람이 있다. 그는 남들이 부러워할 초엘리트 코스를 밟아 법조인 최고 영예인 대법관 자리에 오른 뒤, 이순(耳順)이 넘은 나이에 비로소 자신의 보수성을 극복하고 결국 당대 가장 진보적 대법관으로 자리매김한 인물이다. 미국 사법 역사상 가장 획기적 판결인 낙태허용 판결(로 대(對) 웨이드 사건) 주심 판사로 알려진 해리 블랙먼(1908~1999)이 바로 그 사람이다.

뉴욕타임스 기자 린다 그린하우스의 2005년 저서 는 보수주의자라는 딱지가 단단히 붙어 있던 블랙먼이 24년 대법원 생활 동안 자신도 모르게 조금씩 진보주의자가 되어 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1970년 보수 반공주의자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62세 블랙먼을 대법관 후보에 지명했을 때 세상은 블랙먼을 보수 법관이라 불렀다. 인사 검증을 맡았던 법무부 차관보 윌리엄 렌퀴스트(후일 대법원장)는 그를 온건보수로 평가했고 고향인 미네소타 지역언론마저 "변화를 두려워하는 미국 중산층의 특징을 가졌다"며 대법원의 보수화를 우려했다.

그러나 블랙먼은 세상 평가보다 훨씬 큰 잠재력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는 73년 로 대 웨이드 사건에서 주위 예상을 깨고 낙태 문제에서 여성의 선택권을 인정하는 판결문을 작성했다. 몇달간 산부인과 관련 논문 연구에 몰두했고, 마침내 임신기를 3개 기간으로 나누어 출산이 가까워질수록 낙태에 제한을 두는 아이디어를 고안했다. 이런 실용적 접근은 동료 대법관들의 호평을 얻어 다수 의견으로 채택됐다. 블랙먼의 낙태 판결은 이후 집권한 공화당 대통령들과 미국 보수파들이 틈만 나면 뜯어고치고자 벼르는 진보적 판례의 대명사로 남아 있다. 상업광고가 수정헌법 1조 보호를 받을 수 있다며 표현의 자유 영역을 확장시킨 판결도 블랙먼이 남긴 유산이다. 이처럼 노년의 블랙먼은 20세기 후반 미국 사회 보수화 조류를 거슬러 조금씩 왼쪽을 향해 헤엄쳐 나아갔다.

공화당 대통령때 임명된 블랙먼이 94년 빌 클린턴 행정부 때 은퇴를 선언한 점도 그의 성향이 변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종신직인 대법관이 진보 대통령 임기 중 물러난다는 것은 진보 가치를 지향하는 젊은 대법관이 향후 수십년간 대법원에 머물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실제 블랙먼은 자진 은퇴를 통해 클린턴에게 진보 법관 스티븐 브라이어를 대법관에 지명할 기회를 제공했다.

블랙먼이 남들과 다른 길을 갈 수 있었던 비결은 변화하는 세상에 끊임없이 귀를 기울이고 새로운 시대조류를 향해 마음을 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오전 7시에 출근해 12시간 동안 일한 다음, 밤에는 다시 도서관을 찾을 정도로 열정적으로 일에 몰두한 덕분이었다.

세상의 변화를 판결로 뒷받침하기 위해 그는 평생 친구 워렌 버거(1907~1995) 대법원장과의 우정이 손상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유치원 시절부터 친구였던 블랙먼과 버거는 함께 법조계에 입문, 1년의 시차를 두고 대법원에 나란히 입성했다. 같은 지역 출신에 비슷한 보수 성향을 가진 두 사람을 당시 언론은 '미네소타 쌍둥이'로 표현했다. 그러나 버거에게 의존적이던 블랙먼은 자신의 목소리를 찾아가면서 홀로서기에 성공했다. 자연히 버거와의 사이는 멀어졌다. 대신 '닉슨의 푸들'로 조롱받던'버거의 친구'는 마침내 '판사 블랙먼'이 될 수 있었다.

이영창기자 anti092@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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