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없었습니다."
잊고 있었다. 힘을 써야 하는 운동 선수의 전성기는 20대 중반이다. 30대 중반, 40대 초반까지 현역 생활을 이어가는 건 프로야구나 골프에서 볼 법한 일이었다. 한국 나이로 서른 한 살. 무거운 바벨을 들기엔 이미 최고령이었다.
벌써 3번이었다. 여자 역도 선수로서 3차례나 올림픽에 출전하는 건 전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매일 30~50톤 이상의 바벨을 들어올리는 지옥 같은 시간. 우리는 너무나 가혹하게도 그에게 무거운 짐을 지게 한 것인지도 모른다.
장미란(고양시청)이 눈물을 뚝뚝 떨궜다. 10일 고양시청 체육관에서 열린 은퇴 기자회견에서 "역도선수 장미란"이라는 소개말에 한참이나 눈물을 흘렸다. 1998년 처음으로 바벨을 잡았던 순간, 2008 베이징올림픽에서 금빛 바벨을 들어올렸던 순간 등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듯 했다.
마음을 다잡은 장미란은 이내 은퇴 배경을 밝혔다. 2014 인천아시안게임까지 뛰어 달라는 주변의 간곡한 기대가 있었지만, 결국 유니폼을 벗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고백했다. 장미란은 "신체적으로 선수생활을 더 이어나갈 자신이 없었다. 국민들의 응원에 보답하기 위해 더 좋은 기록을 내고 멋있게 은퇴하고 싶었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며 "마음만 최선을 다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장미란은 2005년 세계선수권대회 우승을 시작으로 2009년까지 여자 역도 최중량급(75㎏이상)정상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는 인상(140㎏)과 용상(186㎏), 합계(326㎏)에서 모두 세계기록을 갈아치우며 국민에게 깊은 감동을 선사했다. 하지만 허리와 어깨 부상을 안은 채 출전한 2012년 런던올림픽에서는 아쉽게 메달을 따지 못했다.
장미란은 "그래도 선수 생활 중 런던올림픽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많은 어려움이 있었는데 정말 많은 분들이 도와주셨다"며 "내가 어떤 선수보다 더 큰 사랑을 받는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이어 "혼자 힘으로 지금까지의 성적을 낸 것이 아니다. 주변의 지원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고 고마움을 표시했다.
장미란은 앞으로 용인대학교 박사과정 공부와 장미란재단 활동에 전념할 예정이다. IOC선수위원에 대한 큰 밑그림도 그리고 있다. 장미란은 "IOC 선수위원이 되면 앞으로 더 좋은 조건에서 사회 활동을 펼칠 수 있다. 자격 요건을 갖추도록 열심히 준비하겠다"고 했다.
함태수기자 hts7@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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