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99%이다"란 말이 반짝 유행했던 적이 있다. 1% 밖에 되지 않는 이들이 세상의 모든 부와 권력을 거머쥐고 나머지 99%는 가난과 질병, 좌절감에 시달리면서 살아가는 세계를 뛰어넘자며 나온 말이었다. 2008년 금융위기가 폭발한 직후 터져 나온 이 사자후는, 그러나 우리 시대의 가장 코미디 같은 아이러니로 기록될 지경이 되었다.
가난한 이들에게 모기지, 신용카드, 학자금 대출을 비롯한 온갖 빚을 권하고 그로부터 천문학적인 돈을 벌어들이던 금융기관들이 밀집한 월가, 그곳을 점령한 성난 젊은이들이 내뱉은 말은 "우리는 99%이다"였다. 그런데 어째 이상하지 않은가? 99%나 된다면 왜 당장 그 1% 밖에 되지 않는 이들을 내쫓지 않고, 조그만 광장에 모여 "우리는 99%"라고 읊조리고 있었을까. 왜 99%나 된다는 이들이 당장 실행에 옮길 수 있는 훌륭한 직접 행동을 마다하고 시위 집단 내부의 민주주의를 토론하느라 긴긴 밤을 지새우고 말았을까. 조금만 짚어 보면, "우리는 99%이다"란 말 속에 스며있는 이데올로기적인 울림을 식별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우리는 이런 엉뚱한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왜 당신들은 "우리는 100%이다"라고 주장하지 않는가? 당신들이 진짜 다른 세상을 원한다면 그것은 당신들의 요구야말로 그 1%까지도 구원할 수 있는 것이라고 감히 주장해야 하지 않는가? 당신들이 진짜 당신들의 주장에 믿음이 있다면 왜 "우리는 100%"라고 말하지 않는가? 어쩌면 그것은 당신들 스스로 믿지 않는 요구, 당신들 스스로 바라지 않는 요구를 던지기 때문에 바로 그 결정적인 1%를 빼고, 99% 만을 셈한 것은 아닌가?
그런 질문을 잇달아 던지다보면 우리는 99%란 주장에서 반향 되는 굳건한 자기 확신이야말로 믿음 없이 세계의 변화를 외치는 자유주의의 특징을 역력히 드러낸다고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이매뉴얼 월러스틴은 프랑스혁명이 가져온 결정적인 특징을 "변화의 정상성"이라고 말한 바 있다. 변화의 정상성이란 말 그대로 변화는 정상적이란 것이다. 세상은 신의 설계에 따라 만들어져 있다거나 우주의 섭리에 따라 돌아간다고 믿는 한, 변화란 곧 죄악이자 파괴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프랑스혁명은 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변화란 당연한 것일 뿐만 아니라 바람직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민주주의는 이런 변화를 조직하기 위한 공간 자체를 가리키는 이름으로 자리 잡았다.
그렇지만 변화를 어떻게 이끌 것인가란 면에서 월러스틴은 3개의 이데올로기가 계기적으로 등장하였다고 말한다. 먼저 변화를 악으로 추궁하고 다시 질서 잡힌 세계로 돌아가길 원했던 보수주의가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변화를 진정한 변화로 만들고자 집착했던 사회주의가 있을 것이다. 그 진정한 변화를 가리키는 유일한 이름은 단연 혁명일 것이다. 반면 이 모든 이데올로기를 압도하며 근대를 지배했던 이데올로기인 자유주의는 다른 접근을 택한다. 그것은 변화를 길들이는 것이다. 자유주의는 변화 자체엔 반대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 변화는 이롭고 합당한 변화여야 한다. 따라서 자유주의는 온갖 전문가를 불러들여 변화가 쫓아야 할 규칙과 방법을 강구한다.
하지만 전문가들과 과학자들의 지식을 좇아 세계의 변화를 이끈다는 것은 곧 세계가 바뀔 수 있다는 믿음을 온전히 가르칠 때만 가능하다. 변화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믿음은 이런저런 조건을 따지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런 '무조건적인' 믿음은 겸손히 자신을 어떤 부분을 대표한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변화에의 믿음은 언제나 "우리는 100%"라는 주장만이 있다. 그렇다면 99%나 되는 이들이 불행하다고 지성적으로 주장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바로 그들이 99대 1의 세계를 말하면서도 아무런 변화를 조직하지 못했던 것은 바로 그 믿음의 결여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실현 가능한 공약이냐를 따지느라 심드렁한 입씨름만 있었던 지난 대선 토론이 추방하고자 했던 것도 변화를 향한 믿음일 것이다.
서동진 계원예대 인문교양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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