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선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지난달 초 워싱턴에서 다소 생소한 뉴스가 전해졌다. 공화당 중진 짐 드민트 상원의원이 의원직을 사퇴하고 보수 싱크탱크인 헤리티지 재단 이사장으로 옮긴다는 것이었다. 미국에서 의원직을 내놓는 것은 더 이상 업무를 볼 수 없는 고령이거나 당선 가능성이 없어서 스스로 물러나는 경우 아니면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에 그의 사퇴는 여러모로 관심을 끌었다. 더욱이 그는 2년 전 재선에 성공해 4년 넘게 임기가 남은 상태였고, 나이도 61세로 상원의원 중에는 비교적 젊은 편이었다.
막강한 권한을 가진 상원의원직을 내던진 그의 결심이 정쟁으로 얼룩진 워싱턴 정가에 신선한 자극제가 되지 않을까 했던 기대는 그러나 그의 사퇴의 변 한마디에 여지없이 깨져버렸다. "보수주의는 사상의 전쟁터에서 강력한 리더십을 필요로 한다. 나는 상원의원직을 떠나지만 전투에서 물러나는 것이 아니다. 헤리티지 재단에 합류해 전투를 이어나갈 것이다." 화합의 밑거름이 되겠다는 것이 아니라 이념 전쟁을 더 가열차게 벌이기 위해 의회를 떠난다는 일종의 선전포고였다. 그가 동원한 단어에서는 살벌한 기운마저 느껴졌다. 그는 의사당에 있을 때도 "60명의 온건파 의원을 갖느니 보수 이념이 확실한 30명의 의원을 갖는 것이 낫다"고 주장하던 골수 보수주의자였다. 보수-진보의 이념 대립이 의회 뿐 아니라 싱크탱크 등의 외곽세력까지 얼마나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지, 또 그런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동원할 수 있다는 적대적 풍토를 보여준 단면이었다.
미국 정치가 타협 없는 이념 대결장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것은 어제 오늘 얘기가 아니다. 하지만 상황은 더 나빠지고 있다. 지난해 11월 치러진 미국 선거는 미국의 분열이 어느 지경까지 와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한 정당이 상ㆍ하원과 주지사를 독식한 주가 전체 50개 중에 37개, 양원제를 채택하는 49개 주 중 한 정당이 상ㆍ하원을 장악한 주는 무려 46개였다. 3개 주만이 민주, 공화 양당이 상ㆍ하원을 분점했다. 이런 일방적인 정치지형은 1920년대 이후에는 전례가 없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승리로 끝난 대선도 마찬가지다. 오바마가 승리한 주는 인디애나와 노스캐롤라이나 두 곳을 빼놓고는 4년 전과 똑같았다. 오바마와 밋 롬니 두 후보의 득표 차이가 5% 포인트 이하의 박빙의 승부를 한 주는 더 줄었다. 진보, 보수의 이념 지형이 그만큼 더 고착화했다는 뜻이고, 소수의 목소리는 더 찾아보기 어려워졌다는 얘기다. 이런 대립은 곧바로 정책의 혼란으로 이어지고, 그 폐해는 국민에게 돌아갈 수 밖에 없다. 총기 참사에 따른 규제 논란, 부자 증세와 동성결혼 갈등, 건강보험 문제 등 미국이 정치적, 행정적으로 엄청난 손실을 감수하는 사례는 너무나 많다. 미국 언론들은 파란색(민주당)의 캘리포니아 주민과 빨간색(공화당)의 테네시 주민이 상대방을 "잘못됐을 뿐 아니라 미쳤다"고 비난한다고 말한다. 이민자의 나라, 다양성의 나라인 미국이 왜 이렇게 됐는지에 대한 탄식이 쏟아지지만 정치권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합리적 해법도 당연히 나올 리 없다.
애석하게도 한국의 정치판도 미국과 다르지 않은 듯 하다. 18대 대선은 고질적인 영ㆍ호남 지역주의에 더해 세대간 갈등까지 노출했다. 2030세대와 5060세대로 대표되는 계층 양극화 문제는 또 다른 대립의 키워드가 되고 있다.
방법은 한가지다. 지지 텃밭을 고수하려는 기존 정당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세력을 키워내는 도리밖에 없다. 양대 수구세력이 50% 지지에 목매 이념의 끈을 안으로 조여매는 한 화합이나 상생은 기대하기 어렵다. 의미있는 제3세력의 출현으로 기존 정당들이 이념의 스펙트럼을 넓히지 않으면 집권할 수 없다는 위기감을 갖도록 해야 한다. 양당제인 미국에서도 제3당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일단 실패로 끝났지만 기존 판세를 위협한 안철수 현상은 한국 정치에 주는 의미가 적지 않다. 제2, 제3의 안철수를 기대하는 이유다.
황유석 국제부 부장대우 aquariu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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