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유학을 떠났다.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돈이 없으면 노숙도 마다하지 않았다. 결국 자신만의 독특한 마케팅 방식으로 서른세 살에 세계적인 명품 메이커 아르테미스의 한국지사 회장이 된 쟝띠엘 샤(박시후). 사람들에게는 근엄하지만 혼자 있을 때는 막춤을 추고, 흥분하면 충청도 사투리가 튀어나온다. "뭐여. 미친 거 아녀?"(SBS '청담동 엘리스')
#2 세계적인 게임 제작사에 최연소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입성한 천재 엔리케 금(윤시윤). 게임을 만드는 감각과 디자인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나 깨방정 때문에 별명도 '깨금이'다. "TV 좀 바꿔주라. 초슬림형 벽걸이 TV 원조나라인 한국에서 어떻게 이런 TV를 볼 수가 있냐. (중략) 차를 사줄래? 호텔 스위트룸 몇 달 예약해주는 건 어때? 무리야? 무리야? 무리데스? 그러면 최신형 벽걸이 TV 한 대로 퉁 칩시다." 마치 랩을 하듯 "TV 사달라"는 이야기로 40초 넘게 수다를 쏟아낸다(tvN '이웃집 꽃미남').
예전 같으면 고급 승용차 뒷자리나 화려한 개인 사무실에서 중후함과 세련미를 한껏 드러내며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세상을 구할 '백마 탄 왕자'식 드라마 주인공들이 망가지고 있다. 언행이 깃털처럼 가벼운데다 생각이 있을까 싶을 만큼 즉흥적이다. 시청률 20%를 넘는 드라마가 거의 없는 드라마 불황시대를 넘기 위해 시청자들에게 친근함으로 다가서려는 주인공들이 등장하고 있다. '청담동 앨리스'는 시청률 15% 대 진입을 목전에 두고 있으며 '이웃집 꽃미남'은 2회까지 분당 최고 시청률 2%로 케이블 드라마로서는 비교적 선전하고 있다.
물론 연기자의 입장에서 망가지는 캐릭터는 또 다른 변신이다. 박시후는 전작인 KBS '공주의 남자'에서 성균관 박사이자 종친들을 가르치는 역할을 맡아 진지함의 극단을 연기했고, 윤시윤은 KBS '제빵왕 김탁구'에서 온갖 역경을 이겨내고 명실상부한 제빵왕으로 거듭나는 주인공으로 나왔었다. 자칫 전작의 진지한 이미지가 굳어질 수도 있는 상황에서 망가지는 역할은 이들의 연기 폭을 크게 넓혀주는 기회인 셈이다.
최근 막을 내린 SBS '드라마의 제왕'에 출연한 최시원은 극중 강현민을 연기하면서 허세가 다분한 톱스타의 모습을 그려냈다. 음주운전으로 기자회견을 열어 거짓 눈물을 흘리는 가식적인 모습, 봉사활동을 나가 아이들에게 독설을 퍼붓는 연기 등을 통해 '최시원의 연기 재발견'이라는 호평까지 얻었다.
SBS '대풍수'의 지진희는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이성계의 모습을 연출해 주목 받고 있다. 무술의 달인이지만 어려서부터 전쟁터를 돌아다니느라 공부를 하지 못해 카리스마 못지 않게 무식함도 넘치는 이성계로 시청자들에게 다가섰다. 한껏 높인 목소리 톤으로 방정을 떠는 모습 역시 새롭다.
코믹 연기를 주로 선보였던 차태현은 KBS '전우치'에서 진지함과 코믹이라는 극단을 소화하고 있다. 전우치일 때는 위기에 빠진 조선을 구하는 영웅이지만 도술을 써서 이치로 변하면 윗사람의 눈치를 보고 투전판이나 드나드는 별 볼일 없는 하급관리가 되어 찌질함의 끝을 보여준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드라마 주인공이 잔뜩 무게를 잡고 나오면 시청자들은 부담스러울 뿐만 아니라 사실성이 떨어진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면서 "무게감을 덜어낸 캐릭터로 드라마는 리얼리티를 살리고 배우는 연기의 폭을 넓히는 긍정적인 효과를 얻게 된다"고 말했다.
허정헌기자 xscop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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