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기록 드물었던 석굴암 우리가 인식 못한 미적 가치전면 보수통해 문화재로 격상日, 서방 제국주의 대항 위해 '亞 문명의 중심'으로 자처 의도"일제가 만든 패러다임 넘어 세계적 보물 재평가 이뤄져야"
"영국이 인도를 버릴지언정 셰익스피어를 버리지 못하겠다고 했듯이, 우리에게 무엇보다 귀중한 보물은 석굴암 불상이다."
1934년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사학자 우현 고유섭(1905~1944)은 석굴암의 가치를 강조하기 위해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이런 평가는 우리 민족이 시대를 거쳐 자연스럽게 쌓아온 공감대가 아니라, 근대 국민국가(nation-state)로 먼저 발돋움한 일제에 의해 교육되고 학습된 것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불교미술가인 강희정(48) 서강대 동아연구소 교수는 최근 펴낸 (서강대학교출판부 발행)에서 이 같은 '도발적인' 논지를 폈다. 강 교수는 7일 기자와 만나 "오늘날 석굴암에 대한 우리의 인식과 자긍심은 근대, 더 정확히 말해 1910년 무렵부터 학습된 것"이라며 "그 이전에는 석굴암 가치를 우리는 제대로 알지 못했다"고 말했다.
"석굴암은 처음 건립된 이래 전혀 움직여지지 않고, 항상 본래 있었던 그 자리에 있었다. 석굴암의 미적 가치나 종교적 의미가 변하는 것은 그를 바라보는 우리들의 시선이 바뀌기 때문이다."(18쪽)
일제강점기 이전에는 그저 신심 깊은 불자의 기도처 정도로 취급을 받던 석굴암이 일제에 의해 재발견돼 '문화재'로 격상됐다는 것이다. 사실 석굴암은 13세기 에 처음 언급된 뒤 17세기에 시인 묵객의 몇몇 시와 기행문에나 간간이 등장할 뿐, 이렇다 할 기록이 거의 없다. 숭유억불정책을 기반으로 한 조선시대에 석굴암은 한낱 '청산해야 할 과거'일 뿐이었다.
석굴암은 1907년 토함산을 넘어 우편배달을 하던 우체부가 우연히 발견했고, 1913년 조선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당시로선 천문학적 금액인 2만2,726원을 들여 전면 보수를 명하면서 '석굴암 재인식'이 시작됐다.
세키노 다다시(關野貞ㆍ1868~1935)와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ㆍ1889~1961) 등 일본 관학자들이 석굴암을 '동양 최고의 미술품'로 추켜세우는 과정으로 이어졌다. 특히 야나기는 1919년 6월 한 학술지에 '석굴암처럼 깊이와 신비를 보여주는 불교예술을 달리 알지 못할 정도로 영원한 걸작'이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강 교수는 "석굴암 재인식 작업의 이면에는 한반도 식민지배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일제 의도가 깔려있다"고 주장했다. 후발 제국주의 국가인 일본이 서구에 맞서 '동양'이라는 새로운 범주의 세계를 만들고, 자신들을 불교ㆍ유교ㆍ예술을 모두 소유하고 보존한 '동양의 중심'이자 '아시아 문명의 보고'로 각인시키기 위한 의도라는 것이다.
강 교수는 "석굴암이 유네스코 국제문화유산에 오를 정도로 전세계가 인정하는 문화유산이지만, 아직 일제시대의 평가를 뛰어넘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라며 "일제가 만들었던 석굴암의 패러다임을 이제 우리 시대 우리의 눈으로 재평가할 시기"라고 말했다.
글ㆍ사진=권대익기자 dkw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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