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인 주식회사를 차리려면 5,000만원만 있으면 가능해요. 제 후배들도 경영 전문지식이 많으니 회사를 만드는데 어려움은 없을 겁니다."
자영업자 A씨는 2년 전 지인을 통해 투자자 B씨를 소개 받았다. 수도권을 기반으로 무역업을 하는 남자였다. 말끔한 외모에 캐주얼한 복장, 재치 있는 그의 언변에 A씨는 믿고 맡겨보기로 했다. B씨는 A씨 명의로 회사를 차리고 1년 동안 자신의 후배들과 함께 거래은행과 대출업무를 도맡았다. 1년 간 은행을 통해 입출금 거래를 무리 없이 해내자 금융권의 신뢰도 쌓였다. 하지만 B와 그의 후배들은 경찰의 관리를 받는 조직폭력배 일당. B는 회사를 설립한 후 1년이 지나자 거래 은행에서 수억 원 대의 당좌ㆍ가계수표를 받은 뒤 이 돈으로 물건을 팔아 이득을 남기고 잠적했다.
조직폭력계가 확 변하고 있다. 1990년대 이전 조폭들이 수 백 명의 조직원을 거느리고 유흥주점이나 불법게임장, 성매매업소 등을 기반으로 세를 과시하고 정치권과도 연결된 거대조직이었다면 차세대 조폭들은 건설업, 사채업, 엔터테인먼트업 등 합법을 가장한 형태로 영역을 확대하고 있는 형국이다. 경찰의 눈에 피하기 위해 15명 안팎의 소규모 조직원을 구성해 활동하는 것도 특징이다. 경찰청의 조폭 담당 경찰관은 "90년 이전 조폭들은 일반인이 운영하는 나이트클럽 등 유흥업소를 보호해 준다는 명목으로 월정금(보호비)를 받았지만 90년대 이후 사법 당국에서 '조폭이 보호비를 받아 챙긴다'는 제보만 들어와도 과감하게 수사에 들어간다"며 "이로 인해 대규모 단위의 조폭이 살아갈 수 있는 돈줄인 보호비의 명맥이 차단됐다"고 말했다. 이 바람에 전국구 조직이 사라지고 중소규모 조폭이 실리를 추구하는 형태로 점차 변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7일 경찰에 따르면 전국의 폭력조직은 217개로 5,384명의 조직원이 활동 중이다. 지역별로 보면 경기가 29개(조직원 912명)로 가장 많고 부산 23개(381명), 서울 22개(484명) 순이다. 부산을 기준으로 볼 때 조직 당 인원 수가 20명이 채 안 된다.
최근에는 전문성을 바탕으로 한 기업형 조폭으로 전환된 경우가 대세지만 생계형 범죄를 저지르는 조폭으로 변질된 경우도 있다. 90년대 후반 서울 서남부 지역 최대 조폭으로 불리던 D파의 조직원 10명은 찜질방 등에서 몰래 훔친 장물 스마트폰 해외 밀수출에 가담한 혐의로 경찰 수사를 받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경찰에서 관리하는 조폭 중에는 유사 석유를 팔거나 전문 사기꾼과 결탁해 절도나 사기 범죄를 저지르며 근근이 살아가는 일당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김현빈기자 hb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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