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생이 화두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은 신년사에서 "민생 현장의 어려움 해결에 국정운영의 최우선 가치를 두겠다"고 했다. 민생은 새 정부의 핵심 키워드가 될 듯하다.
국민소득 2만 달러시대, 그러나 두 쪽으로 갈라진 사회에서 중심 의제로 재등장한 민생 문제는 대다수가 절대 빈곤에 허덕이던 개발시대나, 오래 전 조선시대 때의 먹고 사는 문제와는 차원이 다르다. 그만큼 풀기 어려운 고차 방정식이다. 단순히 일자리가 부족하다거나, 은퇴 계층의 노후가 불안하다는 현실 때문만은 아니다. 지난 50년간 누려온 우리의 성공 공식(성장 중심, 대기업 중심의 박정희식 발전모델)을 바꾸는 문제이고, 한 번도 가 보지 않은 새로운 삶의 패러다임을 발굴하는 과업이기도 하다.
박 당선인은 우리 경제를 중소기업 중심으로 전환하겠다고 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수출과 내수의 쌍끌이 경제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당연해 보이지만 이제까지 어떤 정권도 해내지 못한 난제 중의 난제다. 약속대로 해낸다면, 아니 기틀이라도 마련한다면 혁명적 변화가 될 것이다.
생애 주기별 맞춤형 복지도 마찬가지다. 착실히 실행에 옮겨진다면 우리의 복지 수준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리게 된다. "모든 세대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자부심을 갖도록 사회안전망을 구축하겠다"는 말을 믿고 싶다.
그러나 이것들이 어떻게 가능할까, 그 전략과 실행 방법은 무엇일까 물으면 여전히 안갯속이다. 앞이 보이지 않을 때는 뒤를 돌아보라 했던가.
사실 민생 정치를 말할 때 우리 역사에서 챔피언급으로 꼽힐 만한 인물이 있다. 조선 중기의 개혁가이자 정책전문가인 김 육(1580~1658)이다. '이식위천'(以食爲天ㆍ백성은 먹을 것으로 하늘을 삼는다) '안민익국'(安民益國ㆍ백성이 편안해야 나라에 이롭다)의 투철한 신념으로 대동법의 전국 시행을 이끌어낸 거두다. 대동법은 나라에서 현물(지방 토산물)로 받던 공물을 쌀로 통일해 내도록 한 조세정책이다. 이 정책을 둘러싸고 조선은 17세기 100년간의 대논쟁에 휩싸였다.
당시 조선사회는 두 차례의 전란(임진왜란, 병자호란)으로 쑥대밭이 돼 있었다. 김 육은 토지 소유와 상관 없이 가구 단위로 할당되던 공납을 경작 토지 규모에 따라 부과, 세부담을 공평히 했다. 결과적으로 가난한 백성의 부담을 덜어주고 부자의 세금을 늘린, 요즘식으로 말하면 부자 증세라고나 할까. 그러다 보니 땅을 가진 양반과 부호들의 저항이 거셌다. 방납(防納ㆍ공물을 대납하고 고리의 이자를 받는 일) 등으로 막대한 이익을 챙기던 아전 등 하급관리들과 상인들, 이들과 결탁한 중앙 관료들의 반대가 극심했음은 물론이다.
젊은 시절 10년간 농사를 지으며 농민의 어려움을 절감한 김 육은 인조(1638년) 때 대동법 시행을 꺼내 들었다가 좌절되자, 13년 뒤 효종 때 다시 대동법 추진에 나섰다. "대동법을 실시하든지,'노망한 재상(우의정)'을 내치든지 하라" 고 왕에게 끈질기게 주청, 결국 충청도에서 시행을 이끌어 냈다. 그는 죽기 직전 유언 상서로 대동법의 전라도 확대를 주장했다. 결국 숙종 때(1704년) 전국 시행이 완성된 대동법으로 숨 넘어가던 조선사회는 되살아났다. 그리고 시장과 상업이 발달하면서 조선후기 거대한 사회변화의 물꼬가 트였다.
새 정부 출범을 앞둔 시점에 역사의 갈피에 묻혀 있는 이야기를 길게 끄집어낸 것은 민생을 돌보는 개혁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말하기 위함이다. 정권교체를 넘어 시대를 교체하려면, 한 시대의 경제ㆍ사회 구조를 변화시키려면 기득권층과 이해 관계자의 강고하고 질긴 저항의 벽을 넘어야 한다.
패러다임 전환은 5년 임기로는 짧다. 하지만 이식위천의 신념, 안민익국의 집념으로 50년, 100년을 내다보고 임기 내내 흔들림 없이 추진한다면 변화의 초석을 놓는 것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이것이 어쩌면 새 시대를 여는 지름길일지 모르겠다.
박진용 산업부 차장 hub@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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