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버둥치던 지난 날새엄마 매질에 한 때 도둑질도우여곡절 끝에 간 전문대 중퇴다단계로 신불자·10년 빚 '늪'노숙인 '딱지'에 분노공공근로 월급봉투에도 꼬리표길거리에 패대기 쳐진 느낌자활의지 꺾는 업신여김 너무해저축률 96.61%공공근로로 번 돈 거의 다 저축자립하면 돈 모아 가정 꾸리고어려운 이웃들 도우며 살고파
1977년생 뱀띠인 최성철(36ㆍ가명)씨는 계사년 첫 아침을 '행복한우리집' 주방에서 맞았다. 서울 영등포시장 뒷골목에 자리한 노숙인 자활쉼터 '행복한우리집'은 최씨의 거처이자 일터다. 그는 쉼터 식구들 30여명에게 하루 세 끼 식사를 제공하는 식당에서 주방 보조로 공공근로를 한다. 이날 새벽부터 바삐 몸을 놀려 차려 낸 따끈한 떡국 한 그릇을 뚝딱 비우는 동료들을 보며 그는 새해맞이 각오를 다시 다졌다.
최씨는 쉼터 생활 2년간 공공근로 등으로 번 돈을 알뜰히 모아 1,200만원 가량을 저축했다. 그 덕에 지난해 말 서울시에서 선정한 '2012 노숙인 저축왕' 70명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그는 "나 자신, 그리고 쉼터 원장님과 한 약속을 지켜 뿌듯하다"고 했다. 그 자부심을 밑천 삼아 2013년을 '꿈을 향해 당당히 첫 걸음을 내딛는 해'로 만들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스포츠마사지, 활법 등 자격증을 따려고 해요. 얼른 공공근로에서 벗어나 안정된 일을 찾아야죠. 그래야 집도 마련하고 가정도 꾸릴 수 있잖아요."
키 170㎝에 몸무게 53㎏. 최씨는 지금도 툭 치면 비틀거릴 듯 깡말랐지만, 2년 전 처음 이곳에 왔을 때보다 10㎏ 가까이 살이 올랐다고 했다. 행복한우리집의 이범승 원장은 당시를 떠올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휴~ 말도 마세요. 곧 죽을 것같이 축 늘어져서, 머리는 산발을 하고…. 지금은 용 된 거죠. 게다가 통장 잔고만 따지면 저보다 훨씬 부자랍니다. 성철씨, 내 말 맞지? 하하하." 최씨는 시선을 내리깐 채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산 송장 같은 몰골로 거리를 헤매다 쉼터를 찾기까지, 신산했던 삶이 남긴 깊은 상처를 애써 감추려는 걸까. 엷은 미소가 스치는 듯했던 얼굴은 이내 무표정이 됐다. 분위기를 바꿔보려 어린 시절로 화제를 돌렸다. 그는 길게 한숨부터 내쉬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린 시절이요? 음… 너무 끔직했는데… 어디까지 말씀 드릴까요?"
"하루 걸러 두드려 맞는 게 일상이었어요."
서울서 태어나 부산서 살다 아홉 살 때부터 아버지 고향인 전북 고창에서 컸어요. 2남1녀의 맏이였는데, 징하게 맞고 산 기억밖에 없어요. 도대체 내가 왜 맞아야 하는 지도 모른 채 구박덩이로 살다 중학교 들어가서야 알게 됐어요. 엄마가 새엄마였다는 걸, 동생들이 배다른 동생들이란 걸. 광주 같은 큰 도시에 나가 지압으로 뼈 맞추는 일을 하던 아버지가 어쩌다 집에 오시는 날엔 새엄마란 작자가 없는 일까지 지어내 일러 바치는 바람에 더 지독하게 맞았죠. 중2 때부터 도둑질을 빠졌어요. 아버지 호주머니도 뒤지고 이웃집 저금통도 털고 가게 물건도 슬쩍하고, 닥치는 대로 훔쳤어요. 그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벗어나려면 돈이 필요했으니까. 결국 친구 집을 털다 붙들렸어요. 경찰서 유치장에서 사흘 내내 머리를 박고 있다 간신히 풀려났어요. 그때 결심했죠. 다시는 경찰서 들락거릴 나쁜 짓은 하지 않겠다고. 힘들게 살았어도 그 약속은 지금껏 지켰어요.
중3 때 여자친구를 사귀면서 마음을 잡았어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따뜻함을 느끼게 해 준 사람이었는데, 저 잘 되는 꼴 못 보는 새엄마의 농간에 결국 헤어졌어요. 지금 생각해도 이가 갈려요. 이 악물고 공부했어요. 집에서 벗어날 길을 그 것밖에 없었으니까. 천재 소리 듣던 아버지 닮아 머리는 좋았나 봐요. 성적이 쑥쑥 올랐어요. 고3 담임선생님도 "너 정도면 서울의 4년제 대학 충분히 갈 수 있다"며 격려해 주셨죠. 그런데 안 되려니 별 일이 다 생기더라고요. 수능시험 전날, 어떤 여자가 갓난아기 들쳐 업고 아버지 있는 곳을 알려달라며 찾아왔어요. 그 아기가 또 다른 이복동생이었죠. 새엄마랑 머리채 잡고 싸우고 난리가 났어요. 당연히 시험을 망쳤죠. 담임선생님 볼 면목이 없어 졸업식에도 안 갔어요. 대충 점수 맞춰 지방 전문대 산업디자인과에 들어갔다가 도저히 적성에 안 맞아 때려치우고 군대에 갔죠.
"신용불량 딱지에 사고까지, 죽으려 했어요."
군대도 참 사연이 많네요. IMF 때라 하사관으로 몇 년 복무하며 돈 좀 모아 나올 생각이었는데, 훈련 받다 쫓겨났어요. 체중 미달로 탈락할 뻔한 걸 우겨서 갔다가 도저히 견뎌내질 못한 거죠. 다시 입대해서 일병을 달고서야 지독한 평발인 걸 알았어요. 가뜩이나 체력이 달리는데 그 발로 힘겨운 훈련을 버티다 몸이 완전히 망가졌어요. 의가제대 하라는 걸 끝까?버텼죠. 자존심도 상했지만 그렇게 나와서는 사람 구실 못하던 시절이었으니까.
제대하고 첫 직장이라고 잡은 게 다단계 판매조직이었어요. 시키는 대로만 하면 큰 돈 번다는 말만 믿고 카드를 넉 장이나 만들고 그거 긁어서 물건 사고…. 해보니 전혀 아니더라고요. 금세 빠져 나오긴 했는데 카드 빚 500여만원을 갚지 못해 신용불량자가 됐어요. 그 때 진 빚을 10년이나 안고 살았어요. 이제야 한 달에 얼마씩 갚고 있어요.
전문대 중퇴에 신용불량자, 제대로 된 직장에서 그런 사람을 써 주겠어요? PC방, 전화방 아르바이트에 막노동까지 닥치는 대로 일해도 고시원 신세를 면하기 어려웠죠. 10년을 그렇게 살았어요. 그 사이 아버지도 새엄마랑 헤어지고 혼자 사셨어요. 서로 연락은 하고 지냈지만 형편이 저보다 나을 게 없어 손 벌릴 수도 없었죠.
2010년 여름 공사현장에서 일하다 오른손바닥 살점이 뭉텅 떨어져 나가는 사고를 당했어요. 치료비는커녕 그간 일한 노임도 다 못 받고 쫓겨난 뒤 제대로 치료도 못 받고 먹지도 못한 채 몇 달을 송장처럼 누워서 보냈죠. 이러다 정말 죽겠다 싶어 부산 이모할머니 댁에 찾아갔어요. 20일쯤 신세를 지고 있자니 딸들이 몰려와 돈 10만원 쥐어주고는 서울로 가래요. 한겨울이었는데…. 부들부들 떨리면서 머리 속이 하얘지고 아무 말도 안 나오더라고요. 그래 죽어주마, 했어요. 그 길로 죽으러 왔어요, 서울에, 기차 타고.
"웃자, 웃자, 그러니 조금씩 살 용기가 생겼어요."
막상 죽으려니 너무 억울했어요. 사실 죽을 힘도 없었다고 할까, 그랬던 것 같아요. 거리를 헤매다 우연히 노숙인 상담센터 '옹달샘' 전화번호를 보고 찾아 갔어요. 제 사정을 듣고는 자활쉼터에 들어가는 게 어떻겠느냐고 하더군요. 그땐 쉼터가 어떤 곳인지도 잘 몰랐어요. 술 마시냐? 물어서 가끔 마시지만 많이는 못한다, 도박 하냐? 묻길래 한번도 해 본 적 없다 했더니 "A급이네요" 이래요. 하도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오더라고요. 아무리 발버둥쳐도 패대기 치듯 하던 세상이, 노숙인 쉼터 간다니 'A급' 하고 인정해 주니, 정말 우습지 않나요?
2011년 1월 14일. 그렇게 행복한 우리집에 들어왔어요. 원장님 말씀대로 다 죽어가는 몰골로. 몸도 아프고 사람들도 보기 싫어 한동안 방 안에 틀어박혀 누워만 있었어요. 젊은 놈이 일할 생각은 않고 대낮부터 누워 잠만 잔다고 오해도 많이 받았죠. 특별자활 일을 하며 조금이나마 돈을 벌기 시작했어요. 어깨 아래까지 내려오던 덥수룩한 머리를 입소 석 달 만에 깎았어요. 그제서야 제 얼굴 제대로 봤다며 다들 괜찮네, 잘 생겼네, 하시더라고요. 그냥 한마디 던진 거겠지만, 그 말이 힘이 되더군요. 잔뜩 움츠러들었던 어깨도 조금씩 펴졌어요. 얼굴이 훤히 드러나니 예전처럼 인상 쓰고 다닐 수가 없어 자꾸 웃으려고 애를 썼어요. 그때부터 서서히 마음이 열리고 다시 살아볼 용기도 생겼어요. 병원 열심히 다니며 치료 받아 몸도 좋아졌죠. 6월 여의도공원에 공공근로 일자리를 얻어 이제 좀 해볼까 싶었는데,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 한 달을 겨우 버티고 그만둬야 했어요. 다행히 원장님, 상담실장님 등 선생님들이 애써 준 덕에 9월부터 쉼터 안에서 식당 보조로 공공근로를 할 수 있게 됐어요. 먹여주고 재워주고 이런 것보다 따뜻하게 격려하고 앞으로 나갈 수 있게 해준 것이 정말 고마워요. '노숙인 저축왕'에 도전하게 된 것도 이분들께 은혜를 갚고 싶어서였어요. 저축왕에 선발됐다는 소식 들었을 때도 '내가 약속을 지켰구나' 싶어 뿌듯했어요. 원장님한테도 그렇고, 나 자신에게도 그렇고.
최씨가 공공근로로 버는 돈은 월 90~100만원. 여기서 신용회복을 위한 부채상환 분납액 월 5만원을 내고는 전액 저축을 한다. 저축왕 선발 당시 평가한 저축률은 무려 96.61%. 지난해 1월부터 주택청약저축(월 2만원)도 넣고 있고, 행복한우리집과 에듀머니가 공동 진행하는 '위드세이브' 프로그램에 참여해 월 10만원씩 적금을 부으며 재무설계 교육도 받고 있다. 담뱃값, 전화비 등 생활비는 휴일에도 쉬지 않고 아르바이트를 해 충당한다. "몸이 안 좋아 일을 쉬고 계신 아버지께 20만~30만원씩 부쳐 드리고 있어요. 제 개인적으로 쓰는 건 담뱃값이 월 7만~8만원으로 가장 커요. 몸 생각해서 줄여 보려고 해도 그건 잘 안되더라고요. 대신 술을 거의 안 마셔요. 가끔 쉼터 식구들과 노래방에 갈 때도 오로지 노래만 불러요.(웃음)" 음주가 허용되는 쉼터 공식 행사 때도 그는 소주든 맥주든 두 잔 이상은 절대 마시지 않고, 술을 한 모금이라도 입에 댄 날엔 찜질방 같은 데서 자고 온다고 했다. "그 정도로 정신을 잃거나 주정을 할 만큼 주량이 약하진 않지만, 술 기운에 조금이라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스스로 단속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행복한우리집에서는 쉼터 식구들과 수시로 상담을 진행하며 중단기 인생 계획을 조언한다. 이 원장이 최씨에게 제안한 플랜은 '3년간 총 5,000만원 모아 자립하기'다. "저축왕에게는 월 최대 20만원씩 3년간 저축을 하면 저축액의 50%에 해당하는 지원금을 보태 돌려주는 희망플러스 통장 가입 자격이 주어져요. 성철씨는 그간 모아 놓은 돈도 적잖고 아르바이트 수입까지 있으니 3년이면 5,000만원은 거뜬히 모을 수 있다고 봐요. 그 정도면 공공임대주택을 얻고 스포츠마사지 가게도 구해 탄탄한 자립 기반을 갖출 수 있어요."
하지만 최씨는 제 나름의 계획이 따로 있다고 했다. "원장님 말씀이 굉장히 현실적인 조언이란 건 알겠는데, 제 꿈을 이루기 위해 좀더 서두르고 싶어요. 우리나이로 올해 서른 일곱, 3년 뒤엔 마흔이 돼요. 저도 사람인데, 더 늦기 전에 사람답게 살아야죠. 첫 사랑 이후 여자한테 눈길 한번 줘 본 적 없지만, 이제는 좋은 사람 만나 사귀어 보고 싶고 얼른 가정을 꾸려 자식도 낳고 싶어요. 그런데 운전면허증 하나 달랑 갖고 공공근로 하는 처지에 어디 가서 누굴 만나겠어요? 스포츠마사지 등 자격증을 빨리 따서 작게라도 사무실을 차리든지 방 하나 구해서 하든지 도전을 해 보려고요. 아버지께서 지압 등을 정식으로 가르쳐주진 않았지만 어깨 너머로 배운 것도 있고 나름대로 독학하고 연구를 해왔기 때문에 이쪽 일은 자신이 있어요. 그러다 안 되면, 원장님 말씀 따라야죠.(웃음)"
얽히고 꼬인 옛 사연을 풀어놓을 땐 한숨 아니면 무표정이던 최씨는 꿈 얘기에 이르자 얼굴색이 밝아졌다. 3년 뒤 그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 지 알 수 없지만, 자신의 꿈에 더해 '플랜B'까지 마련해 두고 있으니 마음만은 넉넉해 보였다.
"쉼터에 와서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배웠어요."
여기 선생님들 말씀은 무지 현실적이에요. 두루뭉술이 없죠. 워낙 직설적으로 얘기하니까 강요한다는 느낌이 들 때도 있어요. 처음엔 너무 피곤했지만, 대화하고 타협하면서 세상 살아가는 법을 배웠어요. 그동안 혼자서 내키는 대로 살았는데, 공동체 생활을 통해 서로 공존하려면 기본을 확실히 지키면서 조금씩 양보해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됐죠. 돈 좀 모였다 싶으면 허파에 바람 들어서 나가는 경우도 있지만, 인간관계를 잘 못 풀어 싸우고 나가는 분들도 적지 않아요. 저는 이래 봬도 여기서 꽤 인기가 있답니다.(웃음) 내 돈 써서 식구들한테 커피를 사기도 하고, 지압 등으로 아픈 데도 봐 주고 하니까. 가끔 너무 설친다, 잘난 척 한다는 소리를 듣기도 해요. 그럴 땐 무척 속 상하지만, 한편으로는 세상이 다 내 뜻대로 움직이지는 않는다는 걸 또 배우게 되죠.
"노숙인이란 말을 무슨 딱지처럼 쓸 땐 화가 나요."
저 같이 자활쉼터에서 지내는 사람들도 다 '노숙인'이라고 하더군요. 노숙인 하면 길거리 아무 데나 드러누워 자고 사람들한테 불편이나 끼치는 쓸모 없는 존재로 여기잖아요. 사회적 인식이란 게 그만큼 무서워요. 여기 쉼터에 계시는 분들은 다 자활의지가 강해요. 여기서 지내려면 싫든 좋든 일을 해야 하고, 무조건 저축도 해야 해요. 직장 잃고 가정 깨지고 몸이 아파 잠시 공짜 밥 먹고 공짜 잠 자고 있는 것만 빼면, 보통 사람들이랑 똑같아요. 저는 어디 가면 자활쉼터에서 산다고 당당하게 말해요. 그런데 노숙인이란 딱지를 붙이고 수군거리고 업신여기는 사람들 보면 정말 화가 나요.
재작년 여의도공원에서 한 달 일하고 월급을 받았는데 봉투에 '노숙인 최성철씨' 이렇게 써 있더라고요. 그것도 이 사람 저 사람 손을 거쳐 저한테 전달됐어요. 길거리에 패대기 쳐진 느낌이었어요. 원장님이 전화해서 막 따졌더니 그 뒤로는 안 그런대요. 어떻게든 제 힘으로 살아보려고 애쓰는 사람들, 보듬고 도와주려 만든 게 자활쉼터 아닌가요? 저축왕, 이런 거 안 뽑아줘도 좋으니 따돌리고 업신여기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자립해서 돈 벌면 나누고 베풀며 살고 싶어요."
우리 쉼터에서는 매달 한차례 충북 진천의 중증 정신지체 장애인 시설 '평화의 집'을 찾아 봉사활동을 해요. 청소와 시설물 보수, 텃밭 농사 등을 돕고 장애인들과 놀아주며 하루를 보내죠. 쉼터 식구 중에 중화요리 주방장이 있어서 짜장면과 특별요리 한가지씩을 대접하기도 해요. 지난해 10월엔 '평화의 집' 식구 10명을 초청해 함께 서울 나들이를 했어요. 의무는 아닌데, 딱 한번 빼고는 모두 참여했어요. 처음엔 너무 힘들어서 봉사 가기 전 병원부터 다녀왔어요.(웃음) 별로 해 준 게 없으니 뿌듯하다고까지는 말 못해도, 기분은 좋아요. 서울 나들이 때 짝이었던 친구가 요즘엔 저를 알아보고 '아, 형아 왔네' 하며 쪼르르 달려와 인사를 해요. 쉼터에서 떠나더라도 봉사는 계속 다닐 거예요.
우스갯소리로 들리겠지만, 점 보면 다들 제가 부자로 산대요. 40대 넘어가면 100억원대 재물 갖고 산다고 큰 소리 친 사람도 있어요.(웃음) 그 말 다 믿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 됐으면 좋겠어요. 집 한 채 크게 지어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 공짜로 고쳐주고, 어려운 이웃들 도우면서 살고 싶어요. 큰 돈 못 벌어도 형편 닿는 대로 행복한우리집 후원은 꼭 하려고 해요. 2배, 3배는 못하더라도, 제가 받은 것만큼은 갚아야죠.
선임기자 jay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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