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철학의 아버지 플라톤은 일찍이 필로소퍼 킹(Philosopher King), 그러니까 철인왕(哲人王)을 주창했다. 나라는 철학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 다스려야 이상국가가 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여기서의 철학은 물론 오늘날과 같이 좁은 의미의 철학이 아니다. 고대의 종합적인 학문을 말한다. 이 철학이 처음으로 분화되기 시작한 것은 플라톤의 애제자 크세노크라테스(Xenocrates)가 논리학, 자연학, 윤리학 등 세 가지로 분류한 때부터다.
따라서 오늘날 무슨 학문이든 공부를 웬만큼 한 사람이면 철인왕과 같은 통치자가 되는 것도 별로 어려울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플라톤은 "그 철인왕은 결혼을 하지 말아야 하고 가족관계를 단절해야 한다"는 엄격한 조건을 달았다. 그래야만 정실에 치우치지 않고 사심 없이 깨끗하고 지혜로운 정치를 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러므로 철인왕은 세습제가 아니다. 그런 조건을 갖추도록 특별 교육받은 사람 가운데서 선발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상적 철인왕은 사실상 현실성이 적어 고대 그리스의 정치제도로서는 채택되지 못했다. 하지만 플라톤의 필로소퍼 킹 정신만은 지금까지도 높이 평가되고 있다. 동서고금의 역사에서 왕이나 통치자의 직계가족은 물론 친인척이 관련된 큰 비리와 부정부패 등의 문제가 거의 예외 없이 빚어져 온 것을 미리 내다본 통찰력 때문이다. 어제 오늘 우리의 정치사를 보더라도 예외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서역사를 통틀어 16세기 후반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필로소퍼 킹(퀸)에 가장 근접한 사례로 꼽히고 있다. 결혼을 하지 않은 버진 퀸(Virgin Queen)으로서 대영제국의 기초를 닦은 훌륭한 선정을 베푼 때문이다. 2,400여 년 전 그리스 시대에는 여자와 노예는 참정권이 없어서 플라톤도 필로소퍼 퀸(Philosopher Queen)이라는 말은 쓰지 않았다.
물론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은 필로소퍼 퀸의 조건에 맞추기 위해 의도적으로 결혼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당시 강국 스페인의 필립2세 왕이 내민 청혼도 거절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정치 외교적 이유 같은 것이 주였다. 결과적으로 평생 영국과 결혼한 것이 됐다.
우리나라에서도 지난해 대통령 선거에서 필로소퍼 퀸으로서의 조건을 갖춘 버진 퀸이 탄생했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은 물론 필로소퍼 퀸이 되기 위해 그런 조건을 의도적으로 갖춘 것이 아니다. 결과적으로 그렇게 됐다.
마침 박 당선인은 대선 과정에서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을 가장 존경하는 여성 지도자의 롤모델로 제시했다. 또 부모도, 재산을 물려줄 자식도 없다고 했다. 대한민국과 결혼했다고도 했다. 이는 오로지 나라를 흥륭시키고 친인척관계에서 빚어지는 비리와 부정부패가 없는 깨끗한 정치를 할 수 있는 필로소퍼 퀸으로서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다만 그 조건을 갖췄다고 해서 필로소퍼 퀸 정신의 구현이 자동적으로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방계 친인척이 파고 들 수 있다. 특히 심복이나 측근들이 그 틈을 이용해 엉뚱한 일을 저지를 위험성도 없지 않다.
박 당선인은 그런 위험성마저 최소화하려는 것 같다. 지난 24일 발표한 당선인 비서실장과 수석대변인 인선에서부터 대통령직인수위원장 등의 인선에 이르기까지 측근을 배제하고 전문성을 기준으로 한 의외의 발탁인사를 한 것을 볼 때 그렇다. 필로소퍼 퀸 정신이 그만큼 확장 되는 것이다. 물론 수석대변인 인선은 옥에 티로 여겨지는 측면도 있다.
그러나 정치는 이러한 확장된 필로소퍼 퀸 정신만으로 일관하기 어렵다는 현실론이 앞으로 나올 수 있다. 이 때는 이상론과 현실론의 조화점을 어디서 찾도록 하느냐가 문제가 될 것이다.
어제 대통령직인수위원회 분과별 간사와 인수위원들이 발표됐다. 잇따라 있게될 새 정부 조각(組閣) 등의 요직 인사도 필로소퍼 퀸 정신이 어느 범위와 수준까지 확장될 것인지 주목된다.
이청수 관정이종환교육재단 상임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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