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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맹탈피, 로그 온"… 에티오피아 오지마을 '태블릿PC의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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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맹탈피, 로그 온"… 에티오피아 오지마을 '태블릿PC의 기적'

입력
2013.01.04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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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오피아 중부 휴화산 중턱에 자리한 웬치. 인류 조상 호모사피엔스의 발원지 그레이트리프트 계곡 밑, 화구호 웬치호수를 끼고 있는 해발 3,400m의 산간마을이다. 호수 안쪽으로 쑥 들어간 땅끝이라 호숫가에서도 한 시간을 걸어야 닿을 수 있는 이곳에는 농가 60가구가 전기와 수도 없이 살고 있다.

태곳적 모습 그대로인 듯한 이 오지마을은 지난해 2월 아이들 선물을 든 미국인이 찾아오면서 많은 것이 달라졌다. 매사추세츠공대(MIT) 연구원 매트 켈러(49)가 4~11세 아이 20명에게 하나씩 나눠준 것은 태블릿PC. 아이들이 교육 없이 스스로 학습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규명하고 싶어서였다. 웬치에는 학교에 다니는 아이가 없다. 가장 가까운 학교가 12㎞나 떨어져 있는 데다 부모도 아이가 우물에서 물을 길어오고 소를 돌보길 바라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모두 부모처럼 문맹이다.

지난달 켈러의 다섯 번째 웬치 방문길에 서구 기자들이 동행했다. 켈러가 '웬치의 기적'이라고 부르는 일을 직접 보고 싶어서였다. 마을에서 유일하게 태양광 패널이 지붕에 설치돼 충전이 가능한 오두막에 맨발의 아이들이 갈색 가죽 주머니를 들고 모여들었다. 막내 동생을 업고 온 소녀 아베베크(11)가 주머니에서 태블릿을 꺼내 전원을 켜자 ABC 세 문자가 모자를 쓰고 나타나 알파벳 송을 불렀다. 아베베크는 몇 번이고 능숙하게 따라 부르며 학습용 어플리케이션을 열어 화면에 글자 쓰는 일에 열중했다.

헝클어진 머리에 눈이 큰 소년 켈베사(9)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켈러에게 최근 작업 성과를 보여줬다. 소떼 옆에 있는 할아버지, 여동생, 오두막집을 찍은 2분 분량의 동영상이었다. 지난 여름 켈베사가 태블릿으로 촬영한 동영상과 사진을 처음 보여줬을 때 켈러는 너무 놀랐다. 태블릿을 나눠줄 때 전기와 메모리카드의 과다한 소모를 막으려 촬영 기능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설정했는데 켈베사가 이를 해제한 것이다. 글자를 모르고 기계를 만져본 적도 없는 꼬마가 불과 5개월 만에 혼자 힘으로 말이다.

켈러는 부국과 빈국의 지식 격차를 줄이기 위한 프로젝트 '어린이에게 노트북 한 대씩'(One Laptop per Child·OLPC)의 일원이다. 프로젝트의 책임자는 '디지털 전도사'로 유명한 미디어 학자 니컬러스 네그로폰테(70) MIT 교수. 그는 2005년부터 교육 환경이 열악한 지역에 컴퓨터를 지원해 학습을 돕는 OLPC 프로젝트를 진행, 지금까지 40개국에 300만대를 보급했다.

그동안 지역 학교와 연계해 진행됐던 프로젝트는 노트북보다 조작이 획기적으로 간편해진 태블릿의 개발로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교사의 도움을 받지 않고 직접 아이들에게 컴퓨터를 나눠줌으로써 "문자를 읽는 법만 배우면 모든 지식의 습득이 가능하다"는 네그로폰테의 지론을 본격 검증할 기회를 잡은 것이다. 켈러가 웬치 등 2개 마을에서 진행 중인 에티오피아 프로젝트가 그 시작이다. 프로젝트팀은 암하라(에티오피아 공용문자)보다 활용도가 높다는 계산으로 영어 학습 어플리케이션을 태블릿에 설치했고 충전용 오두막도 마련했다. 우선 1, 2년 동안 아이들의 태블릿 사용 기록을 정기적으로 수집하는 시범 사업을 거친 뒤 프로젝트를 세계적으로 확대 시행할 계획이다.

프로젝트 개시 10주 후 웬치를 찾았던 네그로폰테는 한 아이가 땅 위에 'lion(사자)'이라고 쓰는 걸 보고 울 듯이 기뻤다고 한다. 그는 지난해 10월 학술회의에서 열정적 어조로 웬치의 성공담을 발표했다. "아이들은 태블릿을 처음 받은 지 4분 만에 전원 버튼을 눌렀다. 5일 뒤 글자를 모르던 아이들이 47개 어플리케이션을 사용했다. 2주 뒤에는 알파벳 송을 불렀고 5개월 뒤에는 보안 설정을 해제했다." 그는 "이제 아이들은 읽고 쓸 줄 안다"며 "(프로젝트의) 효과가 있다"고 단언했다.

비판도 없지 않다. OLPC의 목표인 지식 격차 해소가 실상 아프리카 어린이가 서구의 또래보다 재능이 떨어진다는 편견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이다. 독일 주간 슈피겔은 네그로폰테의 학술대회 발표가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에서 (주연 배우인) 로버트 레드퍼드가 개코원숭이 앞에서 모차르트 음악을 트는 장면을 연상시켰다"고 꼬집었다. 컴퓨터 제조사의 불순한 이해가 개입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하지만 OLPC 팀은 성공을 자신하고 있다. 켈러는 "아이들은 이미 1년 동안 유치원을 다닌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배웠다"고 말했다. 팀원이자 언어학습 전문가인 메릴린 울프 미국 터프츠대 교수는 AP통신에 "사실 에티오피아 프로젝트에 회의적이었지만 아이들이 글을 익혀 카메라 보안장치까지 푼 것을 보고 너무 놀랐다"고 말했다. 켈러를 돕고 있는 현지 컴퓨터 전문가 마이크(30)는 슈피겔에 "구호라는 단어에 넌더리가 난다"며 "당신네 백인들은 여태껏 물고기를 줬을 뿐 고기 낚는 법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며 OLPC를 옹호했다.

이훈성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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