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오른 집값
서울에 집 사는데 한푼도 안쓰고 모아도 평균 10.2년 걸려
멀어지는 내집마련
전셋값도 오른데다 월세 전환 추세에 목돈 마련 어려워져
하우스푸어들도 한숨
"이미 원금까지 손실… 거래 활성화 대책을"
대표적인 서민 주택가인 인천 남동구 구월동. 구월동의 방 3개짜리(72.7㎡) 한 다세대주택은 중학생과 초등학생 세 자녀를 둔 이진오(43ㆍ목사), 이영진(39ㆍ교사)씨 가족의 9번째 보금자리다. 이진오씨 부부는 1998년 4월 부천시 원미구 역곡동 보증금 1,500만원 지하 단칸방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한 이후 지난해 10월 이사 온 현재의 집까지 15년째 전세살이를 하고 있다. 평균 1년 반에 한번씩 집을 옮겨 다닌 셈이다. 세 자녀를 데리고 이사를 다니는 일에 지친 이씨는 지난해 10년 장기임대 보금자리주택을 신청했고, 다행히 당첨돼 2015년 5월부터는 고달팠던 전세난민 생활을 '한시적'으로 마감하게 된다. 만약 보금자리주택에 당첨되지 않았으면 이씨 가족의 뿌리 없는 삶이 언제까지 계속됐을지 알 수 없다. 이씨는"나같은 사람은 2억~3억원씩을 모아 집을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무상으로 집을 나눠줘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정부가 장기임대주택을 많이 공급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천정부지로 솟아오른 집값 때문에 결혼까지 미루는 젊은 세대, 임금보다 빨리 오르는 임대료 때문에 정착할 수 없는 '렌트푸어'들, 재산이라고는 집 한 채 뿐이지만 대출이자를 감당하느라 허리가 휘는 '하우스푸어'…. 처지는 제 각각이지만 주거문제는 세대공통의 고민거리다. 국민 1,048명에게 '새 정부 5년 동안 어떻게 변해야 더 행복해질까'를 물은 한국일보 신년 설문조사에서도 3명 중 1명(27.6%ㆍ4위)이 '부동산 가격 안정화 등을 통한 주거안정'을 행복의 조건으로 꼽았다. 대도시 거주자(29.9%)들이 체감하는 주거 고민은 중소도시 거주자(19.4%)나 농어촌 지역(11.4%) 거주자보다 월등히 높았다.
특히 2000년대 초ㆍ중반의 부동산 폭등은 사회생활을 막 시작해 가정을 꾸려야 하는 젊은 세대에게 직격탄이 됐다. '아껴 쓰고 저축하면 집을 장만할 목돈이 생기고 내 집을 살 수 있다"는 신화는 신기루가 되고 있다. 특히 일자리를 찾아 인구가 몰리는 서울의 주거문제는 좀처럼 개선되지 않는다. 지난해 6월 기준으로 서울에 사는 중위소득층이 소득을 한 푼도 안 쓰고 모아도 평균 가격대의 주택을 사는 데 10.2년이 걸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뉴욕(6.1년), 런던(7.2년), 시드니(9.6년) 등 세계 주요 도시들보다도 오래 걸린다.
5일 결혼하는 신부 박경아(29ㆍ가명ㆍ은행원)씨는 "적금 금리는 떨어지는데 전세 값은 예전에 비해 5,6배는 뛰었다"며 "남자가 30대초에 결혼을 한다고 가정하면 부모님께 손을 안 벌리고는 집 마련을 할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박씨는 서울 마포구 용광동의 한 빌라(49.6㎡)에 신접살림을 차렸다. 1억5,000만원 중 6,000만원은 남편과 자신이 모은 돈으로, 5,000만원은 은행대출로 충당했지만, 나머지 4,000만원은 어쩔 수 없이 예비 시부모에게 손을 벌렸다. 부부 수입이 월 500만원 정도라고 밝힌 박씨는 10년 안에 집을 사겠다는 목표를 세웠지만 앞날은 불투명하다. 전세가 빠르게 월세로 대체되고 있어 전세 대출금을 갚으며 월세까지 낼 경우엔 어느 세월에 집을 마련할지 계산이 서지 않는다. "집을 보러 다닐 때 '요즘 전세도 없는데, 정 싫으면 월세로 하실래요?'라고 고자세로 나오는 집주인들로부터 서러움도 많이 느꼈다"는 박씨는 "월세가 대세가 되면 직장인들의 부담은 한층 더 심각해질 것"이라고 걱정했다.
지난해 1월부터 경기 안양시 평촌에서 전세금 1억3,000만원의 아파트(56.2㎡)에 살고 있는 7년차 직장인 김근식(31ㆍ가명)씨도 임대시장이 '월세'로 바뀌는 추세가 적잖이 걱정된다. 이사오기 전(전세금 9,000만원) 살던 집에서 전세금을 4,000만원 정도 올려주고 재계약하려고 했지만 집주인이 보증금 5,000만원, 월세 80만원의 '반월세' 재계약을 요구하면서 계획이 어그러졌다. 누가 매달 80만원을 내고 이 집에 살까 싶어 버텼지만 "들어올 사람 줄 섰다"는 주인의 으름장에 울며 겨자먹기로 집을 옮길 수 밖에 없었던 것. 이사 비용(100만원)도 부담이지만 커가는 아이(2세)를 볼 때마다 2년마다 집을 옮길 걱정은 스트레스다. 김씨는 "전세든 월세든 집주인이 정하는 것이니 정부에서 강요할 수는 없을 것"이라면서도 "2년으로 정해져 있는 전세기간을 3,4년 정도로 연장해주면 세입자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어떻게 집은 마련했지만 집 때문에 생계가 휘청이는 '하우스푸어'들도 할 말은 있다. 집값이 천정부지로 뛰던 시기에 대출을 받고 집을 산 것이 본인 책임이라고는 해도, 출렁이는 부동산 경기가 정부의 일관성 없는 정책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부평 구도심의 한 아파트(79.3㎡)에서 3년 전 2억5,000만원을 대출받아 인천 청라국제지구의 4억원대 (132.2㎡) 아파트로 이사온 정경옥(46)씨는 매달 100만원씩의 이자를 낸다. 이자도 이자지만 집이 큰 만큼 들어가는 돈도 많아 마이너스통장의 빚만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요즘 매매가는 분양가(3억3,000만원)에도 미치지 못하는 2억8,000만원 정도. 투자한 원금까지 손실을 본 상태라 다시 이사갈 수도 없다. "성실하게 노력만 해서는 돈을 모을 수 없다는 생각에 무리를 좀 했지만 요즘 하루하루 시한폭탄을 안고 사는 것 같다"는 정씨는 "투기 목적으로 집을 몇 채씩 산 경우도 아니고 동네 사람들 대부분 집 한 채 달랑 있는 서민들인데 최소한 투자한 돈이라도 건져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정씨는 "거래가 활성화되도록 정부가 손을 써달라"고 말했다.
집이 없는 사람은 없는 사람대로, 집이 있는 사람은 또 있는 사람들대로 새해 소망을 비는 목소리는 간절했다. "집 한 채에 인생 전체가 저당 잡히지 않는 세상에서 살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손효숙기자 shs@hk.co.kr
박주희기자 jxp938@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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