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아시네예. 울릉도는 진짜 겨울에 한번 와봐야 함니더." 첫날 따개비밥 사먹은 저동항 백반집 사장의 말이다. 나중에 그는 솔직해졌다. 엿새 뒤 그의 말. "마-안다고(뭐하려고) 이 치분데(추운데) 들어왔노? 울릉도는 겨울에 오믄 안 된다카이!" 바다 날씨가 심술을 부려 뭍을 오가는 여객선을 물론, 백반집 사장의 본업인 오징어배도 닷새째 꽁꽁 묶여 있었다. '출근'을 못하고 있긴 그나 나나 마찬가지. 속이 터지는 표정의 사장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니, 이래도 회사 안 짤리나?" 나는 푸근히 여유로웠다. 왜냐면… 아마도, 동해바다의 파도 위로 함박눈이 가득 내려 쌓이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DAY 1
2013년을 딱 열흘 남겨 두고 울릉도 가는 배를 탔다. 포항에서 출발한 배는 세 시간 뒤 도동항에 닿았다. 여름 성수기엔 1,000개 가까운 좌석이 꽉꽉 찬다는 배는 이 동네 사투리로 '훌빈(텅 비어있음)'했다. 항구엔 그래도 호객꾼이 있었다. "방 잡았니껴?" 발갛게 낯이 언 아주머니들의 목소리가 무척 쓸쓸하게 다가왔다. 십 리 밖에서 오는 듯한 그 음성들을 비집고 버스터미널로 갔다. 터미널이라고 해봐야 가파른 비탈에 버스 두어 대 댈 수 있는 공간이 전부다. 버스엔 징을 박은 스파이크 타이어가 신겨져 있었다.
"현포 어떻드노? 현포"
도동항에서 목적지인 북면 천부리까지는 해안 일주도로로 한 시간 거리. 기사의 손은 자꾸 핸드폰으로 갔다. 위험하게 왜 저러나 싶은데, 알고 보니 안전을 위한 통화였다. 겨울 울릉도 길은 빙판길, 눈길, 경사로, 급커브, 낙석구간의 악조건을 골고루 갖췄다. 기사는 앞서 간 버스 기사에게 도로 상태를 수시로 물어 계속 갈지 말지 가늠했다. 학포리에서 태하항 거쳐 현포리까지 이어진 고갯길은 그 중 가장 난코스. 트럭 한 대가 넘기를 포기하고 세워져 있었다. 길 상태가 지금보다 나빴던 시절엔 체인을 감고 이 구간만 따로 운행하는 버스로 갈아타고 다녀야 했단다.
북면에 도착하자 어둑해지기 시작했다. 사람 모여 사는 마을로는 국토의 동쪽 끝인 울릉도엔 밤이 일찍 찾아온다. 별이 잠깐 보이는 듯하다 이내 사라졌다. 그리고 툭툭 떨어지는 무엇. 울릉도 대설(大雪)의 시작이었다.
#DAY 2
눈 뜨니 눈은 무릎을 삼킬 만큼 쌓여있었다. 그리고도 하늘에선 계속 탐스러운 눈송이가 떨어져 내렸다. 며칠 배가 안 뜰 것 같다는 민박집 주인의 걱정이 오히려 즐거웠다. 적어도 이날 아침엔.
트레킹 코스는 천부에서 관음도 있는 섬목 돌아 저동까지 이어지는 북쪽 해안을 골랐다. 관음도까지는 도끼로 쪼갠 듯한 수직의 암벽이 파도와 부딪히는 길, 그리고 석포에서 내수전까지는 차도가 아직 개통되지 않은 흙길이다. 남쪽에 비해 사람과 마을이 훌쩍 적다. 스산할 만큼 호젓했다. 다른 계절이었다면 청옥 빛깔 바다 쪽을 봤겠지만, 묵언수행하듯 눈보라와 포말을 묵묵히 받고 있는 암벽에 내내 눈길이 갔다. 신생대에 솟아오른 울릉도는 젊은 섬이다. 해식(海蝕)의 세월이 아직 짧아 울릉도의 표면엔 거칠고 매서운 기운이 넘치고 있었다.
석포와 내수전은 울릉도 동쪽 끝에 자리한 마을이다. 직선거리는 채 3㎞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구불구불한 숲길을 걸으니 두 시간 가까이 걸렸다. 길이 시작되는 석포 부근은 가파르지만, 길은 이내 평탄하고 부드러워진다. 일주도로가 없던 시절엔 읍내 오가는 왕래가 잦았다는데 신작로가 닦이고 인적이 끊겼다. 너도밤나무 섬잣나무 동백나무 굴거리나무가 울창한 숲 사이로 동해의 푸른빛이 굽어보이는 아름다운 길이다. 걷기 열풍이 분 뒤 이 길은 '울릉도 둘레길'이 됐다. 걷다가 딱 쉬고 싶을 만한 곳에, 쉬기 딱 좋은 정자가 하나 있다. 아주 옛날엔 주막터였단다. 1962년부터 이곳에 19년 동안 산 부부가 길 잃고 배 곯은 사람 300여명을 거뒀다는 얘기가, 약수터 나무 표지판에 적혀 있었다.
#DAY 4
12월 24일, 그러니까 크리스마스 이브다. 계획대로라면 서울에 있을 시간이었다. 그러나 해발 400m 나리분지에 갇힌 지 사흘째. 파란 하늘이 조금 보이는 듯 해서 방을 나오면, 눈은 기다렸다는 듯 다시 퍼붓기 시작했다. 울릉군이 발표한 적설량은 87㎝. 눈은 허벅지를 완전히 삼키고 허리까지 닿고도 계속 내렸다. 나리분지는 커다란 분화구가 흙으로 메워져 평지가 된 땅이다. 산꼭대기부터 밭까지 온통 하얘서, 마치 눈이 담긴 커다란 함지박 같았다. 설국의 풍경이 그저 눈부시게 아름다운 건, 그러나 대략 사흘까지가 한계인 듯했다. 이날부터 눈이 '하얀 흙덩이'로 보이기 시작했다. 설피도 소용 없었다. 1m를 나아가는데 1,000㎉는 소모될 것 같았다.
갖고 간 책도 노트북에 다운로드 받아 둔 영화도 다 보고 나니 정말 할 일이 없다. 한가함이 점점 갑갑함으로, 또 짜증으로 변해갔다. TV를 켰다가 바로 껐다. 징글벨이라니. 그리고 배가 고팠다. 밥을 챙겨주던 민박집 아주머니는 교회 가셨다. 딱 한 군데 문을 여는 식당 주인 할아버지도 성당 가셨다. 고민 끝에 동네에 있는 공군부대 교회로 갔다. 쭈뼛쭈뼛 문을 열고 들어섰는데, 성탄절은 역시 베풀고 나누는 날이었다. 따끈한 떡국이 눈물 나게 맛있었다. 핸드벨로 찬송가를 연주하는 군인 자녀 어린이들이 천사처럼 보였다. 메리 크리스마스!
#DAY 7
배가 뜬다는 소식에 이른 아침부터 도동항으로 향했다.동네를 어슬렁거리는데 커피 생각이 간절했다. 역시나 고민 끝에, 선착장이 내려다보이는 다방으로 들어갔다. 다행히도 "옵빠야" 하고 달려들어 맞은편에 앉는 아주머니는 안 계셨다.
커피라면 나도 좀 마셔봤다고 생각했었다. 사하라 사막에서 마신 사약처럼 진한 것부터 베트남 정글 속의 당도 높은 찐득찐득한 것까지. 그런데 이곳에서 전혀 새로운 커피를 만났다. 이름하여 '물블랙'. 아메리카노가 어떠해야 하는 것인지 설명하고 나니, 종업원이 "아, 물블랙"하면서 가져온 커피였다. 맛은 자판기 블랙커피와 보리차의 중간쯤 됐다. 그런 커피의 향(?)이 몸을 아늑하게 감싸는 것도, 아마 울릉도에서만 가능한 체험일 듯했다. 눈은 떠나는 날에도 계속 내렸다. 하얀 흙덩이가 다시 담결한 결정으로 내려와 살갗에 닿았다.
여행수첩
●포항과 묵호, 강릉에서 울릉도로 가는 배가 있으나 겨울에는 포항-울릉도 노선만 운항한다. 소요시간 3시간. 포항 기준 출항 6만4,400원, 입항 6만2,900원. 포항 출발 오전 10시, 울릉도 출발 오후 3시. 결항되는 날이 많고 입출항 시간이 수시로 바뀌므로 반드시 미리 확인해야 한다. 대아고속해운 1544-5117. ●흔히 해상관광이나 성인봉 등산만 생각하지만 울릉도엔 멋진 트레킹 코스가 세 곳 있다. 도동항에서부터 행남등대로 알려진 도동등대를 거쳐 저동항까지 이어진 행남산책로(약 3㎞), 남양리부터 태하등대를 잇는 옛길(약 12㎞), 석포와 내수전을 잇는 숲길(약 8㎞)이다. 행남산책로는 날씨에 따라 폐쇄될 수 있다. 울릉군 문화관광체육과 (054)790-6392.
유상호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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