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7만표 대 1,469만표의 놀라운 양자 결집 끝에 '87년 체제', '최초의 과반대통령'을 탄생시킨 그 대선이 끝났다. 박근혜 당선인이 2007년 이명박 후보와 이회창 후보의 득표수 총합인 1,500만표를 돌파하기는 어렵다고 오판했던 필자는 승패와 관계없이 그 득표수에 놀랐다. 사람의 마음을 제대로 읽지 못한 '(유사)공학적 예측'을 반성해야만 했다. 또 이를 만들어낸 요인 중 하나인 출구조사 추정 '투표율 90%'라는 특정 세대의 놀라운 결집을 보고 세대문제와 이른바 '민주개혁세력'의 무능을 생각했다.
세대문제는 오늘날 필자가 이 지면에 글을 쓸 수 있도록 한 주제라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2008년 촛불시위 이후 청년층의 정치적 각성과 참여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있었고 청년세대에게 지면을 내주는 풍조가 생겼다. 물론 실컷 특집기사로 청년층을 질타한 다음 너희들 변명도 들어보자는 식으로 마지막 지면을 던져주는 경우도 적잖았지만 그것조차도 하나의 기회였다.
이런 종류의 지면이 생겼을 때, 필자는 본인이 생각하는 정치적 문제를 세대문제라는 틀거리 안에 어떻게 녹여낼 것인가를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특정 세대의 삶이 힘들다고 '징징'대는 것을 넘어 그 세대의 문제를 통해 사회문제를 드러내야 의미있는 글이 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고민을 하며 글을 쓰다 보니 또래 세대의 문제도 더 잘 파악을 하게 되고, 시대의 문제도 더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얘기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대론에 관한 글들은, 사회문제를 세대 간 갈등으로 파악하거나 특정 세대의 몫을 뺏어 다른 세대에게 나눈다는 식의 발상으로 이해될 위험이 있었다.
2030세대와 50대 이후 세대가 대결하는 것처럼 되어버린 이 선거 결과의 '세대분열'은 필자가 느꼈던 그 딜레마를 떨쳐내지 못한 것이라 해석된다. 이 세대와 저 세대는 주로 부모 자식관계로 얽혀 있고 경제적인 이해관계의 차원에선 반드시 대립하지는 않음에도 불구하고, 분열을 조장하는 언어들 속에서 각 세대를 대변하는 정치인이 따로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된 것이다.
이 구도가 진실에는 부합하지 않더라도 야권에게 승리하는 길이었다면 그러한 전술을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산업화의 성공이 가져온 평균 수명의 증대와 민주정부 이후 신자유주의의 수용 등이 얽혀서 가속화된 저출산의 기조는 세대 인구구성의 측면에서 야권이 '세대분열'의 승자가 될 날을 끝없이 지연시키고 있다. 그리고 민주당과 진보진영은 그간 본인들이 서민을 어떻게 대변할 것인지에 대해 치열하게 설명하기보다 종종 저학력 노년층들의 '무지한 선택'에 한탄하는 자세를 취했다. 그 결과는, 박정희에 대한 폄하를 자신의 청년시절의 노동에 대한 폄하로 받아들이는 특정세대에 대해선 본인들이 대변해야 할 취약계층에 대해서도 접근할 길이 막혀버린 답답한 현실로 드러났다.
최근 영화 '레미제라블'이 300만 관객을 넘기며 대선 결과에 실망한 어떤 유권자들을 정서적으로 '치유'한다는 얘기가 들려온다. 그런데 그런 감동의 기저에 깔린 인식이 자신들을 바리케이트의 학생으로 느끼며 기성세대와 분리하는 것이라면 이도 걱정이다. '레미제라블'이 감동적인 부분이 있다면 늙은이가 젊은이들을 챙기는 이야기라는 점에서일 것이다. 청년들은 이번 선거에서 그런 배려를 받지 못했다고 느꼈기에 이 영화에서 위로받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혁명엔 동참하지 않고 수양딸의 정인만을 구한 장발장의 태도는 사실 있는 재산이라도 지키며 자녀에게 물려주겠다는 선택을 한 우리네 부모님의 그것에서 크게 멀지 않다. 바리케이트의 학생과 자신을 동일시했다면, 박근혜를 찍은 부모님과 장발장을 포개보는 정도의 상상도 나쁘지 않다.
영화에서도 장발장은 '민중의 노래'에 동참하지 않다가 죽은 이후에야 개사된 노래를 힘차게 함께 부른다. 누군가는 바리케이트 희생자들이 부르는 천상의 노래에서 위안을 받은 모양이지만, 굳이 상상해야 한다면 우리에게 더 필요한 것은 이런 종류의 '화해'가 아닐까.
한윤형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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