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중소기업 시절이 그립습니다. 중소기업 때는 각종 지원과 혜택이라도 있었는데 그런 게 싹 없어졌어요."
경기도 소재 부품생산업체 I사 대표 A씨는 "중소기업 때보다 매출을 10배 이상 성장시켰지만 정부의 자금지원, 세금 감면 등 혜택이 중단되면서 오히려 경영난을 겪을 정도"라며 한숨을 내 쉬었다. 지난해 중견기업에 진입한 이 회사는 저리의 정책자금지원, 채용 인센티브, 세제혜택 등이 사라지면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산업의 허리'인 중견기업이 무너지는 건 단순히 경기침체 때문만은 아니다. 중소기업 시절 받던 혜택은 사라지고, 오히려 대기업들에 치이면서 원천적으로 설 땅 자체가 없어지고 있는 것이다. 중견기업의 붕괴는 중산층의 몰락처럼, 경제의 버팀목이 사라지고 상승의 사다리가 철거된다는 의미다.
황인학 한국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중소기업을 졸업하면 인센티브(지원)는 없어지고 규제만 대폭 늘어나는데 누가 중견기업이 되려 하겠냐"고 반문했다. 그러다 보니 중소기업으로선 중견기업이 되기 보다는 그냥 중소기업으로 남아 있으려는 일종의 '피터팬 증후군(영원히 어린이로 남으려는 성향)'이 만연하게 된다는 것이다. 전현철 중견기업연합회 부회장은 "중소기업 지위를 잃지 않으려고 일부 기업은 기업 쪼개기를 시도하거나 직원 수를 줄이기까지 한다"고 애로를 호소했다.
경제민주화 흐름과 맞물려 중소기업 적합업종 제도로 규제를 받는 것 역시 중견기업에 심각한 타격이다. 한국중견기업연합회에 따르면 현재 적합업종 제도로 규제를 받는 중견기업은 137곳에 이른다. 연합회는 지난달 동반성장위원회의 서비스업 적합업종 지정을 앞두고 "중견기업을 어떻게 대기업과 똑같이 다루나. 적합업종 심사과정에서 일반 대기업(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들과 다른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며 강하게 반발했다.
대기업들의 태도도 문제다. 중소기업을 졸업하는 순간 모든 보호막이 사라져 대기업과 똑같이 경쟁해야 하는데, 대기업의 약탈적 행태에서 도저히 버티기 힘들다는 지적이다. 한 중견기업인은 "중견기업이 됐으면 대기업이 되는 것을 꿈꿔야 하지만 우리나라 재벌의 진입장벽을 뚫기란 불가능에 가깝다"고 말했다.
우리나라와는 대조적으로 독일은 '중견기업의 천국'으로 불린다. 독일의 중견기업 수는 전체기업의 12%가 넘고, 고용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46%에 달한다. 특히 대중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각 분야에서 세계시장을 지배하는 중견 우량기업, 즉 '히든 챔피언'이 무려 1,500여개에 달한다. 지난 2003년부터 '아젠다 2010'을 통해 ▦신용대출 지원 ▦창업지원 ▦기술지원 등의 결과물인데, 우리나라 전체 중견기업 수(1,291개)보다도 많다. 코트라 관계자는 "유럽위기를 이겨낸 독일경제의 힘은 벤츠나 BMW, 지멘스 같은 대기업이 아니라 탄탄한 허리 즉 중견기업에서 나왔다"고 평했다.
정부도 지난해부터 중견기업 육성정책을 펼치고 있지만 아직은 걸음마 단계. 특히 단순히 중견기업 수 증가를 넘어 우량 중견기업, 글로벌 중견기업을 육성하는 것이 당면 과제다. 이병기 한국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중견기업이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선 대기업이나 중소기업보다 낮은 연구개발(R&D) 투자를 더욱 늘려야 하고 정부도 이를 정책적으로 뒷받침해줘야 한다"고 지적했다.
중견기업들은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중견기업은 우리 경제의 튼튼한 허리이자 일자리 창출과 신제품 개발, 수출의 새로운 성장 엔진"이라고 직접 강조한 만큼, 새 정부의 정책변화에 큰 기대를 거는 분위기다.
김종한기자 tellme@hk.co.kr
이성기기자 hangi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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