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있는 놈들 지들 맘대로 해! 그 놈이 그 놈 , 다 똑같은 놈이야." 여기까지는 통념의 수준이다. 그러나 곧 이어 "아무나 죽여도 젤 센 놈 죽이면 상관 없어"로 넘어간다. 범죄의 차원으로 바뀌는 것이다. 뮤지컬 '어쌔신'의 주인공은 범죄자들, 그것도 링컨부터 레이건까지 미국 역대 대통령을 암살했거나 암살하려 했던 9명이다.
존 와이드만 극본에 스티븐 손드하임이 작곡한 이 뮤지컬은 지극히 브로드웨이적이다. 애초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는다거나 어떤 해결책을 고민하려는 뜻은 없다. 브로드웨이가 쳐 놓은 울타리 안에서 미국의 치부를 보여주고는 "자 어쩌란 말이냐"며 어깨를 한 번 으쓱한다. 2004년 토니상을 석권하다시피 한 이 작품은 미국 뮤지컬의 역사 읽기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다.
암살범 9명의 실제 사진과 신상 명세가 낡은 필름의 영상처럼 쭉 지나가는 도입부는 서사극적이다. 말미에서 해설자가 나와 "여긴 못사는 놈과 패배자를 위한 자리"라며 "모든 범인들은 관심을 끌고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고 싶어했다"고 한 마디 거드는 것 역시 서사극적 장치일 것이다.
그러나 현실을 총체적으로 표현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는 무대는 개인의 일탈적 모습에만 초점을 맞춘다. 심각한 주제의 무대가 외려 즐거운 것은 그래서다. 범인의 과대망상이나 주장을 자꾸 확대하면 곧 코미디가 되고, 거기에 볼거리를 입히면 전체는 하나의 쇼가 된다.
무대는 미국 키치 문화의 일대 향연장이다. 팝콘, 프라이드 치킨을 게걸스레 탐하는 인물들의 미국식 유머와 호들갑은 젊은 관객들과 곧바로 소통한다. 미국의 어두운 이면도 마찬가지다. 산타클로스 복장의 굶주린 남자는 '득템'이라며 쓰레기더미에서 찾아낸 음식물을 허겁지겁 먹으면서 뒤틀린 세상에 대한 적의를 배설한다. 이 입심 좋은 거지의 일인극은 미국판 '품바'라 해도 좋을 만하다.
역사의 희화는 후세의 권리다. 2004년 토니상을 석권한 이 희극적 뮤지컬은 역사적 진실을 슬쩍 끼워 넣을 만큼 영리하다. 링컨의 암살범 존 윌크스 부스가 등장해 신문을 읽으며 나름 진지하게 욕설을 퍼붓는 대목은 사건이 개인이 아니라 사회적 차원의 것이었음을 충분히 암시한다.
한국에서는 2005, 2009년에 이어 세 번째인 이번 공연은 배우 황정민의 연출 데뷔 무대이기도 하다. 2월 3일까지 두산아트센터 연강홀.
장병욱 선임기자 a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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