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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스스로 당당해지길바랐는데… 이젠 힘이 부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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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스스로 당당해지길바랐는데… 이젠 힘이 부치네요"

입력
2013.01.01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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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 피해 여성 돕는 '브이데이' 운동동양 최장기 공연하고 못이뤄 아쉬워순우리말 이름 말하기 껄끄럽다고요?불러줘야 인정하고 기억하고 솔직해져"

12년 동안 공연해 온 연극 '버자이너 모놀로그(Vagina Monologues)'가 6일로 막을 내린다. 충무아트홀 소극장 블랙에서 마지막 공연 중이다.

미국 극작가 겸 사회운동가 이브 엔슬러가 여성의 성기를 소재로 여성 200여명을 인터뷰해서 쓴 이 작품은 페미니즘 연극의 대명사로 자리잡았다. 입 밖에 꺼내면 안 될 단어로 통하던 여성 성기의 이름을 정면으로 불러내 여성의 존엄성과 주체성을 이야기하는 연극이다. 1966년 뉴욕 초연 이래 파키스탄 등 회교권 4개국을 포함해 전 세계 30여 나라에서 공연됐고, 한국에는 2001년 상륙했다.

이 작품을 한국에 소개한 사람은 국내 대표적 연출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이지나씨. 공연 라이선스를 갖고 직접 기획, 연출해서 12년째 끌고 온 그는 "의미 있는 작품이고 아직 필요하다는 생각에 버텨왔지만, 이제 힘이 부친다"고 고백했다.

"12년간 이 작품을 하면서 여성들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당당해지기보다 남자를 사랑하고 남자에게 잘 보이려고 몰두하게끔 키워진 사회적 환경에 놀랐다. 이러한 사회적 인식을 바꾸고 여성 스스로 자유로움을 얻는 데 힘이 되지 않을까 싶어 공연을 해 왔지만, 이제는 힘이 부친다."

무엇보다 사회적 파급 효과가 기대만큼 안 나온 것에 기운이 빠졌다.

"다른 나라에서는 이 작품을 계기로 여성에 대한 폭력에 반대하고 피해 여성을 돕는 '브이 데이(V Day)'운동이 발전했는데, 한국에서는 동양 최장기 12년 공연을 하고도 그걸 이루지 못한 것이 가장 아쉽다."

모놀로그, 곧 독백의 주인공인 '버자이너'는 여성의 외부 생식기를 가리킨다. 버젓이 순우리말 이름이 있지만 말하기 껄끄러운 단어를 피하려다 보니 작품 제목이 어려워졌다. 민망함을 무릅쓰고 굳이 그 이름을 불러내는 이유를 극중 대사가 말해준다. "이름을 불러주지 않으면 인정하지도, 기억하지도 못합니다. 우리가 그 이름을 아무렇지도 않게 입 밖에 내서 말할 때 우리는 더욱 솔직하고 자유로워질 것입니다."

여배우 3명의 토크쇼 형식 연극이다. 미국에서는 위노나 라이더, 수전 서랜든, 우피 골드버그, 케이트 윈슬렛, 멜라니 그리피스, 브룩 쉴즈, 기네스 펠트로 등 세계적 스타들이 출연했고, 트랜스젠더 여성들만의 무대를 꾸민 적도 있다. 한국에서는 서주희 예지원 전수경 최정원 등 20여명의 배우가 거쳐갔다. 서주희의 모노드라마로 한 적도 있다.

단어가 주는 충격 때문인지 2001년 초연 당시 더러 혹평과 비난을 사기도 했지만, 야하거나 불쾌한 연극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치유의 연극이다. 솔직하지만 모나지 않고 유쾌하다. 여성에 대한 폭력과 억압을 고발하고, 상처 입은 여성을 위로하고, 인간 누구나 기억하는 생명 탄생의 근원적인 장소로서 그곳을 환기시키며, 여성들에게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사랑하라고 말한다.

"공연을 보고 가슴이 따뜻해졌다는 말을 들을 때 가장 보람을 느낀다. 처음에는 출연자 섭외도 어려웠다. '아니, 그 단어를 말하라고요? 저를 뭘로 보고' 그런 반응도 있었으니까. 남자도 봐야 할 연극으로 알려지면서, 지난해부터 관객의 30%가 남성인 것에서 변화를 실감한다."

작품 내용은 매년 업그레이드돼 왔다. 지난해부터는 극작자 이브 엔슬러가 한국의 종군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해 쓴 시가 추가됐다. 올해는 한국에 시집 와서 남편의 학대에 시달리는 온 베트남 여성, 살을 빼려고 단식원에 간 비만 소녀, 트랜스젠더 여성의 에피소드가 새로 들어갔다. 현재 공연에는 연극배우 황정민, 탤런트 임성민과 김세아, 팝아티스트 낸시랭, 뮤지컬 배우 방진의, 연출가 장유정이 출연하고 있다.

오미환 선임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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