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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에도 빚을 졌다는데

입력
2012.12.31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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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몇 권의 새해 달력이 생겼다. 한 사진가가 우리 고궁을 사진으로 멋지게 담은 달력도 있고, 파리에서 발행된 유머러스한 그림들이 담긴 달력도 있다. 그 가운데 '빛에 빚지다'라는 이름의 달력을 벽에 건다. 빛에 빚지다. 낱말의 두음을 살린 장난스런 제목 같지만, 그 제목이 담고 있는 함의는 크다.

2009년 서울 용산참사 당시 현장에 머물면서 희생자들을 목격한 사진가들이, 사진으로 세상에 필요한 '최소한의 변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뜻으로 모임을 만들었다. 그 모임이 해마다 연말이 가까워지면 사진을 담은 달력을 제작하고 판매한다. 사진가들과 기획자, 디자이너 등 수십 명이 재능기부 형태로 사진을 내고, 아이디어를 내고, 디자인을 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달력 '빛에 빚지다'는 실제작비를 제외한 수익금을 그해 우리 사회에서 연대가 가장 시급한 곳에 전달한다. 용산을 시작으로 기륭, 쌍용에 이어 올해의 수익금은 콜트·콜텍 해고 노동자들에게 전달되었다. 텅 빈 공장에서 6년째 복직을 위한 농성을 이어가고 있는 이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려는 것이었다.

카메라의 특성상 사진은 빛이 없으면 태어날 수 없으니, 사진가들은 스스로 빛에 빚을 졌다고 여긴다. 하지만 빛에 빚을 진 사람이 어디 사진가들뿐이겠는가. 이 달력은 만든 사람들뿐만 아니라, 사는 사람들도 달력의 제작자들이다. 한 부에 1만 3,000원 하는 달력이 선 구매 형식으로 판매됨으로써 제작이 이루어진다. 달력이 나오기도 전에 2,000부가 팔렸고 대형서점 등의 유통경로를 거치지 않았는데도 나머지 1,000부가 모두 팔렸다. 자신의 집에 걸기 위해 한 부를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주변 사람들에게도 나눈다며 한꺼번에 여러 부를 사기도 한다. 빛에 빚을 졌다는 사진가들의 부채감 못지않게,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빚진 마음'이 있는 것이라고… 그렇지 않다면 달력이 만들어지기도 전에 선구매하는 마음과 열두 달 어느 한 장 열어보지도 않고 사는 마음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달력의 '1월'을 펴서 벽에 거는데, 친정 엄마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바쁜 출근 시간임을 알기에 아침엔 전화를 거는 법이 없는데. 창밖에는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고, 출근길 교통체증을 생각하면 마음이 바빴다. 엄마는 앞뒤 없이, 눈 이야기를 했다. 골자는 이랬다. 옛날에 엄마가 혼자서 너희들을 기를 때, 너무 힘이 들어서 어느 겨울 잠시 이모 집에 너를 맡긴 적이 있다. 어린 네가 돈암동 초등학교에서 사당동 이모 집까지 혼자 버스를 타고 등하교를 해야 했다. 이모 집에 맡겨진 지 며칠 안 돼 눈이 아주 많이 내린 날, 학교에서 오후면 돌아와야 할 네가 새벽 두 시에 들어왔다고 했다. 전화가 없던 시절이라 다음날에야 전해 들었는데, 하얗게 눈에 덮여 모양이 바뀌니 이모 집을 못 찾아서 온 동네를 헤매다 꽁꽁 언 채로 그 시간에야 들어왔다는 것이다. 그러더니 말끝에 "엄마가 미안해"라며 우셨다. 눈이 펑펑 오는 창 밖을 보니, 그때 일이 생각난다는 것이었다. 나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얼마 전 협심증으로 심혈관 시술을 한 이후, 몸과 마음이 부쩍 약해진 엄마다. 심장이 아프면 마음도 약해진다는 말이 진짜인가 싶을 정도다. 30여 년 전 일을 오늘 사과하다니… 바쁜 연말 하루를 보내는 동안 창 밖에서는 계속 눈이 내렸다. 늦은 밤에 친구로부터 눈이 많이 내렸다며 안부 전화가 왔기에, 기어이 엄마 이야기를 꺼내고 말았다. 조금 울기도 했던 것 같다. 그때, 오래 전에 친정 엄마를 저 세상으로 떠나 보낸 친구가 말했다. 우리 엄만 어릴 때 내 머리끄덩이 잡은 거 사과도 안 하고 돌아가셨다고. 아프고 울보엄마라도 사과 하는 엄마가 곁에 있으니, 다행이지 않느냐며.

지난 한 해 나는 우리 가족에게, 가까운 이웃들과 사회에 어떤 빚을 졌을까. 연말이면 묵은 빚을 갚고 새해를 맞아야 한다는데, 그 셈이 되지 않는 빚들을 어찌 갚을까.

뜯어낸 달력 표지에 적힌 '빛에 빚지다'라는 제목이, 아프게 눈에 와 박힌다. 달력의 영어 이름 어원에 장부라는 의미도 있다는데, 새 장부에는 마음 빚들이 조금이라도 덜 기록되었으면 좋겠다.

박미경 갤러리 류가헌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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