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사람 6명 중 1명은 연간 소득이 998만원도 안 되는 빈곤층이다. 특히 선진국보다 3배나 많은 자영업에서 과잉 경쟁을 벌이는 50대 이상은 빈곤층 비율이 가장 높은 계층이다. 50대 자영업자 176만명 중 74%는 영세한 '나 홀로 자영업자'다. 베이비부머들이 퇴직 후 재취업이 어렵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자영업에 뛰어들고 있지만, 집을 담보로 빌린 대출금과 퇴직금을 까먹으며 빈곤의 한계선상에 놓인 게 현실이다. 한발만 삐끗하면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상황인데도 그들을 받쳐줄 사회안전망은 취약하기 그지없다.
보수는 경쟁과 성장의 가치를 중시한다. 그래서 대개 가진 자와 대기업에 유리한 정책을 편다. 반면 분배와 평등을 중시하는 진보는 노동자, 농민 등 경제적 약자에 기울기 마련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사회적 약자인 서민층이 진보를, 가진 자들은 보수를 지지하는 게 옳다. 하지만 선거 결과는 거꾸로다. 한국갤럽이 대선 투표 당일 2,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결과를 보면, 농업ㆍ임업ㆍ어업 종사자는 55 대 29, 자영업자는 52대 42의 압도적인 비율로 박근혜 후보를 지지했다. 4월 총선에선 월 소득 100만원 이하 계층의 76.2%가 보수 여당을 찍었다는 조사결과도 나왔다. '20대 80 사회'에서 80에 속하는 사람들이 20을 대변하는 정당을 지지하니 진보가 보수를 이기기는 쉽지 않다.
이런 계급배반 투표는 다른 나라에서도 흔히 일어난다. 미국에서도 가장 가난한 주인 캔자스나 웨스트버지니아주가 보수 공화당의 아성으로 꼽힌다. 가난한 사람들(50대 이상 비율이 가장 높다)이 보수정당을 지지하는 이유는 뭘까. 역사학자 토머스 프랭크는 미국의 보수 세력이 1960년대부터 자산가와 보수 기독교, 영향력 있는 언론매체와 연합전선을 구축해 보수적 가치를 전파해왔다고 분석한다. 이 과정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빈곤의 원인인 경제 문제에 집중하기보다는 낙태와 동성애 등 보수적 가치관에 물들어 공화당을 노동자, 농민을 위한 정당으로 믿게 됐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다를 게 없다. 보수는 거대 언론과 대학, 연구기관을 장악하고 있다(김재철 MBC 사장의 퇴진을 막기 위한 보수의 눈물겨운 노력을 생각해보라). 교육기관은 경쟁 만능의 시장경제를 절대선으로 가르치고, 거대 언론은 이념 안보 종북 등 보수의 담론과 의제를 반복해서 전파한다. 교회는 빈곤을 경제구조가 아닌, 신앙을 통해 개인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가르친다. 애국심과 권력에의 복종을 부추겨 보수화를 이끄는데도 선수다.
보수의 언어는 감성적이다. 이번 대선에서도 행복, 민생, 화합 등이 보수진영의 핵심 키워드였다. 진보의 언어는 이성적이다. 보편적 복지나 증세 등은 가슴보다는 머리로 인식해야 하는 단어다. 그런데 인간은 이익에 따른 합리적인 선택을 하기보다 프레임에 따른 감정적 선택을 하는 경향이 강하다(미국의 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 자신의 가치관에 따른 프레임으로 판단하는 것이지, 주머니 사정이 영향을 미치는 건 아니라는 얘기다.
사회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의 견해도 비슷하다. 사람이 무엇을 판단할 때 이성보다는 본능적 직감에 의존하며, 이성은 직감이 먼저 판단한 것을 논리적으로 변명할 때만 이용된다. 의견이 다른 사람을 이성적 언어로 설득하기는 쉽지 않다는 말이다.
그런데 진보는 보수도 진실을 알면 돌아설 것이라 굳게 믿고 이성적 언어로 계속 설득하려 든다. 하지만 보수(보수화된 서민)에겐 이런 접근이 통하지 않는다. 진보가 집권하면 국가안보가 위태롭게 될 것이며, 복지 포퓰리즘 탓에 나라 곳간이 금세 절단 날 것이라는 보수적 프레임에 젖어 있기 때문이다. 진보는 논리적인 설득이 통하지 않는 보수를 이해하기 어렵다. 그래서 야유하고 조롱하고 힐난하며, 분노와 증오의 언어로 공격해대기도 한다. 이러니 가난한 보수에게 진보는 잘난 체하는 지식인 정도로 여겨질 뿐이다.
진보는 선악의 이분법 구조나 흑백논리에서 속히 벗어나야 한다. 안티 5060운동에 나설게 아니라, 그들과 만나고 소통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수십 년 간 국민 대중을 지배해온 보수의 감성적 언어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5년 후도 기약하기 어렵다.
고재학 경제부장 goindo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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