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진화생물학자 데이비드 바래시의 경험담이다. 검수리의 생태를 관찰하기 위해 절벽의 둥지에 접근했을 때였다. 새끼에 위협을 느낀 어미 수리가 발톱을 세우며 달려들었다. 그러다 덩치로 보아 승산이 없다는 걸 깨닫고는 방향을 틀어 근처를 지나던 굴뚝새들을 맹렬하게 뒤쫓았다. 먹이감으로 삼기엔 너무 작고 스피드로도 따라잡을 수 없는 굴뚝새 추적은 아무 실리도 없는 행동이었다. 센 상대를 어쩌지 못하고 대신 만만한 대상을 괴롭히는 명백한 화풀이였다.
■ 동물원에서 느닷없이 관람객들에게 공격적인 반응을 보이는 원숭이는 대개 방금 경쟁에서 졌거나 서열 높은 상대에게 당한 수컷이라는 것이다. 애먼 대상을 희생양 삼는 '화풀이'가 사실은 동물의 일반적 본성에 가깝다는 뜻이다. 화풀이를 하고 나면 실제로 스트레스 호르몬 수치가 낮아진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문제는 직접적 보복보다도 화풀이가 더 악성이라는 점이다. A에서 B로, B는 다시 C에게로… 이런 식으로 끝없는 전염성을 갖기 때문이다.
■ 박빙의 대선결과로 인한 분노와 상실감이 워낙 큰 탓일 것이다. 그렇더라도 2030세대를 중심으로 노인지하철 무임승차 폐지 서명운동이 번지는 양상 등은 기가 막히다. 노인빈곤율이 OECD 최고수준이면서도 노인복지예산은 최저인 현실에도 눈감은 치졸한 화풀이다. 더욱이 "나이가 권력이냐" "노인 민폐" 따위의 비아냥은 힘들여 오늘의 국가위상을 만들어내고도 제 한 몸 건사할 생각은 못해보고 살아온 대다수 노인들에겐 비수와 같은 언사일 것이다.
■ 그렇지 않아도 유난히 뜨겁고 길었던 대선과정을 거치면서 걱정스러웠던 것이 이런 식의 후유증이었다. 이래서는 안 된다. 화풀이는 애꿎은 희생자를 만들고 그에게 고통을 전가함으로써 스트레스를 푸는 가장 저급하고도 비겁한 심리적 회복방식이다. 분노는 사안의 원인을 외부 아닌, 스스로에게로 내면화할 때 비로소 치유의 단초를 얻게 되는 법이다. 그러니 2012년 마지막 날, 모든 서운함과 화를 저무는 해에 실어 보낼 일이다. 이제 곧 새로운 날이 다시 시작되므로.
이준희 논설실장 jun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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