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에는 인간사와 같은 '희로애락'의 파노라마가 담겨 있다. 일상에 지친 사람들은 스포츠를 통해 대리 만족을 느끼고 고달픈 삶을 잠시 쉬어 가기도 한다. 2012년은 어느 때 보다 굵직한 이벤트가 많아 스포츠 팬들에겐 기분 좋은 한 해였다. 우선 유로 2012, 런던 올림픽을 보기 위해 전세계 스포츠 팬들이 TV 앞에 몰려 들었다. 우사인 볼트(육상ㆍ자메이카) 마이클 펠프스(수영ㆍ미국) 등 거물급 스타들은 런던의 밤을 화려하게 수 놓았다. 국내에서도 볼거리는 많았다. 사상 첫 700만 관중을 돌파한 프로야구, 아시아 정상에 오른 프로축구, '피겨 여왕' 김연아의 복귀전은 국민들에게 적잖은 감동을 안겨줬다. 하지만 아쉬운 장면도 많았다. 여자 펜싱 신아람을 울게 만든 '1초 오심', 프로야구에서 터진 승부 조작 파문 등은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환희와 슬픔이 교차한 2012년 스포츠를 '희로애락'으로 정리해봤다.
喜, 런던 영웅들의 눈물과 류현진의 환호
지난 7월27일 개막한 런던올림픽에서는 '13명의 영웅들'이 탄생했다. 한국은 13명의 금메달리스트들을 앞세워 역대 원정 하계올림픽 최고 성적에 해당하는 5위에 올랐다. 그 중 남자 체조 도마의 양학선(20ㆍ한체대)은 힘겨웠던 어린 시절 사연이 공개돼 국민들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달동네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시절 철봉과 구름 사다리를 타고 놀며 체조 선수로 성장한 양학선은 전북 고창의 한 비닐하우스에 살고 있는 부모님이 늘 걱정됐다. 그의 부모님은 마땅한 병원비도 없어 제대로 된 치료 조차 받지 못했다. 하지만 불우한 환경을 뒤로 하고 양학선은 공중에서 세 바퀴를 비트는 신기술 '양학선'을 완벽하게 성공하며 최고의 영웅으로 우뚝 섰다. 비록 메달을 따지 못했지만, 경기 뒤 신드롬을 몰고 온 주인공도 있다. 손연재(18ㆍ세종고)는 리듬체조 개인종합 예선에서 6위를 기록, 한국 체조 사상 첫 결선 무대에 진출한 뒤 결선에서도 높은 점수를 따내며 5위에 올랐다. 실력뿐만 아니라 귀여운 외모로도 주목을 받은 손연재는 올림픽 이후 각종 방송과 광고의 섭외 대상 1순위로 떠오르며 쉴 틈 없는 나날을 보냈다.
2012년 스포츠계의 마무리는 '괴물' 류현진(25ㆍLA 다저스)이 맡았다. 올해까지 한국프로야구에서 7시즌을 보낸 류현진은 약 280억원에 달하는 이적료를 원소속팀 한화에 안겼고 6년간 약 390억원의 연봉을 받아내는 '잭팟'을 터뜨렸다. 한국프로야구에서 메이저리그로 직행한 첫 번째 선수가 된 류현진은 다저스의 3선발로 내년 시즌을 시작할 예정이다.
怒, 프로야구까지 승부조작… 뒤통수 맞은 팬들
프로 스포츠 사상 처음으로 700만 관중 돌파를 이뤄낸 프로야구. 하지만 야구 팬들은 올 시즌 제대로 뒤통수를 맞았다. 프로축구를 덮친 승부조작 파문이 프로야구에까지 번진 것이다. 작년 LG 마운드의 신데렐라로 떠올랐던 박현준과 김성현은 올해 초'검은 돈'을 받고 경기 조작에 가담한 것으로 드러나 대구지검 강력부에 체포됐다. 특히 이들은 끝까지 "승부 조작에 가담하지 않았다"고 당당한 모습을 보여 야구계는 분노에 휩싸였다.
야구계에 오점을 남긴 사건은 또 있었다. 2011년부터 올해까지 롯데를 이끌었던 양승호 전 감독이 지난 13일 야구 특기생 대학 입학비리 혐의로 전격 구속됐다. 양 전 감독은 고려대 야구부 감독 시절이던 2007~10년 "대학에 입학시켜달라"는 청탁과 함께 학부모 등으로부터 1억원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 동안 소문으로만 무성했던 입학 비리가 수면 위로 떠오른 순간이었다.
올림픽에서는 신아람(26ㆍ계룡시청)이 '멈춰버린 1초' 탓에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신아람은 브리타 하이데만(독일)과의 여자 펜싱 에페 준결승 연장전에서 경기 종료 1초를 남겨두고 세 차례 공격을 막아냈다. 그러나 잔여시간을 알리는 경기장의 시계는 그대로 '1초'에 머물렀고 신아람은 네 번째 공격을 허용해 지고 말았다. 당시 비긴 채 경기를 마쳤다면 신아람이 경기 시작 전 얻은 어드밴티지로 결승에 오를 수 있었기 때문에 국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哀, 아 옛날이여~ 길을 잃은 박지성·박주영
올해 한국 축구에서는 기분 좋은 소식이 잇달아 들려왔다. 홍명보 감독이 이끈 올림픽 축구 대표팀은 런던에서 사상 첫 동메달을 따냈고, 프로축구 울산 현대는 '철퇴 축구'로 아시아 정상에 올랐다.
하지만 박지성(31)과 박주영(27)에게 2012년은 우울한 한 해였다. 지난 2005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입단, 한국 축구의 '얼굴' 역할을 했던 박지성은 올 시즌 좀처럼 그라운드를 밟지 못하고 있다. 지난 7월엔 퀸스파크 레인저스로 이적해 주장 완장까지 찼지만 사령탑 교체와 무릎 부상이 겹치며 추운 겨울을 보내고 있다. 올림픽 동메달의 주역인 박주영의 사정도 비슷하다. 아스널에서 전력 외로 분류됐던 박주영은 올림픽 직후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셀타 비고로 임대 이적했다. 그러나 여전히 감뗌?확실한 눈도장을 받는 데 실패하며 출전 시간을 보장 받지 못하고 있다.
여자 배구에서는 세계적인 공격수로 성장한 김연경(24)이 해외 이적 문제로 한 바탕 곤욕을 치렀다. 김연경은 지난 10월 중순까지 원소속팀인 흥국생명과 자유계약선수(FA) 자격을 놓고 심각한 갈등을 빚어왔다. 김연경은 해외 임대기간 3년을 포함해 이미 흥국생명에서 7년을 뛴 만큼 FA 자격을 얻었다고 주장했고, 흥국생명은 해외 임대기간 3년은 FA 요건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맞섰다. 결국 대한배구협회가 국제이적동의서를 발급하며 극적으로 해외 진출이 가능하게 됐지만, 올림픽에서 맹활약 한 김연경은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
樂, 승패보다 경기를 즐겼다… 진정한 스포츠맨들
'천재는 노력하는 사람을 이길 수 없고 노력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는 격언이 있다. 이는 스포츠 정신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다. 한국이 낳은 스포츠 스타들이 승패 보다는 경기 자체를 즐기면서 팬들에게 큰 교훈을 줬다.
'코리안 특급' 박찬호(39ㆍ전 한화)는 최근 열린 은퇴 기자회견에서 "한국으로 올 때 1년을 목표로 삼았다. 한국 야구를 위한 나의 역할에 대해 분명하게 계획한 것이 있었기 때문에 미련을 갖지 않고 은퇴를 결정했다"고 했다. 박찬호가 말한 '계획'은 1년 동안 팬들에게 최선을 다해 던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운동 선수로는 이미 할아버지에 접어들었지만 승패와 상관없이 마운드에 선 모습 자체가 박찬호에게도, 팬들에게도 바로 '락(樂)'이었다.
'피겨여왕' 김연아(22ㆍ고려대)와 '마린 보이' 박태환(23)도 결과 보다는 경기 그 자체를 즐겼다. 1년8개월 만에 빙판으로 돌아온 김연아는 최근 "2014 소치올림픽 무대를 끝으로 은퇴할 예정이다. 메달 색깔 보다는 후배들을 이끌면서 좋은 연기를 보여주고 싶다"며 "아직 피겨계에서 할 일이 남아있어 복귀를 택했다"고 말했다. 김연아는 복귀전인 NRW트로피대회에서 200점대의 고득점으로 화려하게 복귀했다.
박태환 역시 올림픽 2연패에는 실패했지만 라이벌을 인정하는 '쿨'한 모습을 보였다. 2008 베이징올림픽 남자 수영 자유형 400m에서 금메달을 딴 박태환은 런던에서 중국의 쑨양에 밀려 은메달에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박태환은 "쑨양의 실력이 나보다 낫다.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후회는 없다"고 말했다.
함태수기자 hts7@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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