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아름다움을 그곳에 사는 파리지엔들은 정작 모른다. 파리를 제대로 보고 평가하는 건 오히려 그곳을 찾는 내방객들이다. 한 곳에 오래 살다보면 인습과 통념에 절어 주위에 대한 평가가 둔해지기 때문이다.
국가나 사회에 대한 평가도 마찬가지다. 한국인의 효와 그 가치는 영국의 역사학자 고 아놀드 토인비의 눈을 거칠 때 비로소 제 모습을 찾는다. 토인비는 역사를 한갓 사건의 교직(交織)으로 보지 않고, 무엇이 세상을 바꾸는 것인지 그 동력을 추구했던 거시적 사관의 학자다.
"한국에서 장차 인류문명에 크게 기여할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부모를 공경하는 한국의 가족제도, 한 마디로 효사상일 것이다."
한국의 효야 말로 미래의 세계를 바꿀 결정적 동력으로 그는 본 것이다. 한국의 정치를 예리하게 지적한 싱가포르의 국부 리콴유의 코멘트를 아래 인용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서양과는 다른 오직 '아시아적 가치'를 표방해온 이 빼어난 수재 총리가 그의 자전적 역저 (The Singapore Story)에서 묘사한 한국정치의 스케치는 다음과 같다.
"전통적으로 끝까지 투쟁하는 경향이 있는, (예컨대)한국과 같은 나라의 국민들에게 민주주의가 이식될 때, 민주주의는 제 기능을 다 하지 못한다. 한국인들은 그 나라의 집권자가 군사 독재자든 민주적으로 선출된 대통령이든 관계없이 거리에 나와 싸웠다. 한국 사람들은 자신의 (투쟁)풍습과 문화에 걸 맞는 형식의 대의 정부만을 발전시킬 뿐이다."
한마디로 끝장을 봐야 직성이 풀리는 한국인의 '극성'을 언급한 것이다. 여기서 굳이 리콴유를 언급하는 것은 지금처럼 눈만 뜨면 귀 따갑게 들려오는 '사회통합'소리가 역겹기에 하는 말이다. 사회통합? 어림없는 이야기다. 예의 '극성'을 몰라 하는 소리다. 안 될 짓만 골라하겠다는 건 무슨 억하심정인가. 사회통합이 지닌 문제는 그 해법의 부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 어느 정권 어느 이데올로기로도 못 푼 이 난제를 출범 두 달 남긴 임기 5년의 한국 대통령 당선인이 감히 풀겠다는 그 위선에 있다. 그렇다면 이 난제를 풀 대안은 없다는 말인가? 있다. 1989년 남아공 대통령에 취임한 넬슨 만델라의 탕평책이 그 모범적 사례다.
"내일 아침 당장, 각자 본연의 업무에 돌아가, 이 새 나라가 당면한 새 일거리에 소매를 걷어붙이고 달려듭시다"라는 연설을 마친 만델라는 자기를 외딴 로빈 섬에 27년간 유배시킨 백인정권의 드 클레르크 대통령을 바로 그 취임식 현장에서 부통령에 임명, 전 세계에 감동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지도자의 이런 감동은 또 수준 높은 유머로도 나타난다. 영국 수상 처칠이 화장실에 들렀다가 사사건건 반기를 드는 노동당당수를 보자 멀찌감치 떨어져 소변을 봤다. 다음은 둘 간의 대화. "왜 그리 멀리 가슈, 윈스턴 양반?" "보호본능이외다. 당신은 큰 것만 보면 무조건 국유화시키려 들지 않소?"
이 감동은 지도자의 취임세리머니로도 나타난다. 88년 재선한 프랑스의 좌파 대통령 미테랑도 예의 감동을 십분 활용한 대통령이었다. 빨강장미 한 송이 달랑 들고 취임석상에 오른 미테랑한테 온 파리 시민들이 기립박수를 보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대통령이 참석한 유럽정상회담에 나타나 매번 동석을 요구하는 우파 시락 총리의 극성에 미테랑은 단 한 번도 찡그린 기색을 안 보였다. 이 장면을 지켜보던 파리 시민들이 오히려 애간장을 태웠다. 장미꽃 감동이 금도(襟度)와 원숙의 감동으로까지 이어진 것이다. 감동은 이처럼 이데올로기를 초월한다. 사회통합의 결정적 해법은 못 되지만, 사회갈등을 줄이고 교란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대안이 바로 감동이다.
안타까운 건 이런 일련의 감동과는 전혀 따로 노는 우리의 정서에 있다. 국민들만 해도 이 감동을 기대하고 받아들일 정도로 훌쩍 성숙해있건만, 문제는 아직껏 냉전 식 틀에서 못 벗어나는 우리 좌파, 그리고 견적필살(見敵必殺)을 능사로 여기는 보수꼴통들의 미성숙에 있다. 그 '극성'에 있다는 말이다.
김승웅 전 한국일보 파리특파원 swkim4311@naver.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