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생과 회춘이라는 인류의 유구한 욕망은 과학의 진보와 더불어 어떤 미래를 맞게 될까. 노화의 억지(抑止)는 과연 가능할까. 소설가 복거일 씨의 SF적 상상력은 그 가능성에 회의적이다. 생식기능을 수행한 개체의 자리가 비워져야 진화한 새 생명의 자리가 생긴다는 게 자연의 기획. 노화는 성(性)의 필연적 부산물이어서 없앨 수도 없지만 설사 가능하더라도 인류의 재앙일 것이라는 입장이다. 견결한 자유시장주의자인 작가는, 영생 역시 시장경제에서 가능태를 찾는다. 늙고 돈 많은 자가 돈이 필요한 젊은 몸을 사는 것. 돈과 젊음의 이 교환은 뇌의 이식을 통해 이루어진다.
소설의 배경은 두어 세대쯤 지난 미래의 북한이다. 반(反)중국 독립운동 혐의로 체포돼 중국의 강제노역장에 끌려갔다가 25년 만에 출소한 44세의 남자. 귀국 후 그는 뜻밖에도, 옛 연인이 낳은 24살 난 자신의 딸을 만난다. 결혼을 앞둔 딸을 위해 해줄 게 없는 남자는 제 육체를 판다. 엄밀히 말하면 늙은 구매자의 몸과 덜 늙은 자신의 몸을 맞바꾸는 것. 소설 속에서 육신 교환(뇌 교환)은 별 의학적 어려움도 법적 제약도 없다. 북한 사회 역시 개혁 개방 자유화의 기운이 제법 무르익은 것으로 그려져 있다.
소설이 천착하는 것은 정체성의 문제다. 과연 개인의 정체성이 몸무게의 약 2%에 불과한 뇌에 있을까, 진화생물학자들의 주장처럼 모든 유기체의 임무가 생식이고 유전자를 나르는 것이라면, 뇌보다 나머지 98%(특히 생식기)가 정체성의 주체여야 하지 않을까, 뇌가 기억의 저장고임에는 틀림 없지만 그 기억이라는 것도 온 몸의 감각기관을 통해 얻은 것이다, 가장 선명한 기억은 우리 몸이 직접 경험한 것이어서 몸이 분리되면 기억도 훼손될 수밖에 없다….
작가가 후기에 썼듯이 새 기술은 묵은 문제들을 풀면서 새 문제들을 불러오고, 그 과정에는 낯선 철학적 질문들을 제기한다. 또 새 기술의 낯선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은 어떤 이들의 영웅적 삶을 필요로 한다.
소설은 저 철학적 질문들을 짊어진 채 주인공 남자의 삶을 그려나간다. 40대의 영혼으로 60대의 육신을 지니게 된 남자의 기억 속 삶과 육신이 속한 현실의 삶, 그리고 남자의 운명적 선택이 문학적이면서도 과학적으로 펼쳐진다. 소설은 그리 길지 않지만, 독자의 상상은 작가가 전개한 상황 너머로, 텍스트가 끝난 뒤로도 길게, 오래, 이어진다. 의 마지막 구절이자 작가가 선택한 이 소설의 마지막 구절 "(…) 그들은 서로 손 잡고서 비틀거리고 느린 걸음으로/ 에덴동산을 지나 그들의 외로운 길을 걸었다"처럼.
최윤필기자 proos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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