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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현실은 소통의 글쓰기로 닿을 수 있다

입력
2012.12.28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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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철학자 블랑쇼의 후기사상 "글 통한 타자와의 소통으로 실재 발견하는 순간이 카오스"

헤겔 등 근현대사상 흐름 속 신화·동시대 저작 재해석

모리스 블랑쇼(1907~2003)는 사르트르, 카뮈와 동시대 프랑스 지식인이며 20세기 현대철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푸코, 들뢰즈, 데리다 등 후기구조주의자에서 낭시, 라쿠, 아감벤 등 최근 유명세를 타는 사상가들에게는 하나의 준거점이다.

는 블랑쇼 후기 사유를 집대성한 대표작으로 2009년 을 시작으로 블랑쇼의 대표저서를 묶은 '블랑쇼 선집' 8번째 책이다. 국내에서는 이번에 처음 번역됐다. 역자인 박준상 숭실대 교수는 "삶의 직접적인 문제들을 시적, 문학적으로 쓰는 독특한 저자"라며 "이 책은 후기 사유를 단상형식으로 그렸다"고 소개했다.

제목이 이 책의 주제를 집약하고 있다. 블랑쇼가 말하는 카오스는 '실재'(Real)를 발견하는 순간이다. '실재'는 정신분석학자 라캉이 제시한 용어인데, 영화 '매트릭스'에서 주인공 레오가 빨간 약을 먹고 살게 된 '실재의 사막'처럼 체험이나 상상을 통해 재구성되지 않은 진짜 현실을 일컫는다. 블랑쇼 저작에 자주 등장하는 '중성적인 것' '바깥' '끝나지 않는 것' '침묵' 등도 이 개념의 연장선에 있다. 그 실재를 발견하는 순간은 바로 타자와 소통하는 언어, 글쓰기를 통해 구현된다는 것이 블랑쇼의 주장이다.

헤겔은 인간 정신(진리)이 미리 주어지고 완성된 선험적 구조가 아니라 자연(정)과 개인(반)의 투쟁 속에 지양되는 것(합)이라고 봤다. 변증법에서 인간 정신이 지양되며 코페르니쿠스적으로 전환하는 바로 그 순간이'실재의 순간'이다. '정신은 단 한 번에 또는 미리 완성되어 진리의 실체적 토대로 우리에게 주어져 있지 않으며, 시간성에 따라, 헤겔의 표현대로 '역사성'에 따라 완성을 향해 나아간다.' 그리고 담론, 즉 언어야말로 미리 주어진 단일한 형식의 세계, 즉 자연을 '살해하는' 동시에 새로운 공간으로 인간을 끊임없이 이주시킨다.

이 책은 이런 근현대 사상의 흐름 안에서 정신분석학자 세르주 르크레르의 저작 와 나르시시즘의 어원이 된 그리스의 나르시스 신화를 재해석한다. 르크레르의 저서 속 '한 어린아이'는 '존재와 우리 삶이 어떤 언어, 담론으로 수렴되거나 종속되지 않고, 어떤 언어, 담론을 통해서도 규정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요컨대 이 어린아이는 자연 상태로서의 존재, 언어를 통해 사회화되지 않은 존재다. 인간정신은 개인 안에 숨어있는 저 길들여지지 않은 어린아이를 끊임없이 살해하며, 지양된다. 아이는 끊임없이 죽으면서 또 죽지 않는다.

저자는 우물에 비친 나르시스를 이 어린아이에 비유한다. 나르시스가 연못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새롭게 발견하듯 인간에게는 자기 자신도 모르는 또 다른 자아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르시스가 우물 속 자신에게 외치는 메아리가 침묵으로 되돌아오는 것처럼 어린아이의 죽음, 실재의 순간 역시 침묵으로만 드러난다.

블랑쇼는 '타자성의 철학'을 설파한 철학자 레비나스와 만난 뒤 쓴 이 책에서 이런 실재의 순간은 타자와의 매개에서 비롯된 것임을 강조한다. '삶 자체가 흔들리고 위태로워지고 나아가 파탄에 이를 때, 그 어린아이가 이제 '나'를 대신해 '말하기' 시작한다.'

책은 동시대의 저작들을 재해석하는 일기 형식의 단문으로 이어진다. 블랑쇼 특유의 시적이고 감각적인 문장, 문학과 철학의 경계에 선 자유분방한 글쓰기는 기승전결의 논리구조 없이 이 책을 한 권의 시집처럼 읽도록 만든다. 문장이 눈부시다.

이윤주기자 mis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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