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Special] 매듭과 시작, 회한·앙금을 씻고 바람·의욕을 담다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Special] 매듭과 시작, 회한·앙금을 씻고 바람·의욕을 담다

입력
2012.12.28 11:43
0 0

한파도 체증도 막을 수 없는 해에 대한 본능적인 이끌림차분하고 개인적 양상의 해넘이 활기차고 집단적 양태 띤 해맞이황홀함과 초월적 숭고美 앞에 한점 티끌로 서서 경외감 젖다

연말. 살기 바빠 잊고 지내다가도 문득 뭔가가 간절히 그리워지는 때다. 결핍감이나 상실감이라 해도 좋을 그 그리움의 대상은 사람일 수도 있고, 사물일 수도 있고 지나쳐 온 시간이나 공간일 수도 있다. 이맘때면 우리는 달랑 한 장 남은 달력, 몇 안 남은 숫자들 위로 그리운 것들을 하나 둘 겹쳐 보며 싸한 아픔에 젖기도 한다.

과거로 나아갔던 그리움이 지금 이 빈 자리로 되돌아오는 여정은 대개 회환과 아쉬움으로 버무려지는 과정이다. 우리는 그 슬픔의 빈 공간, 감당하기 힘든 허전함을 잊기 위해 이런저런 어울림의 핑계들을 만들어, 마치 다 자란 아이가 허구의 산타클로스를 믿어주듯, 그렇게 누려왔는지 모른다. 연말의 우리는 밀린 숙제처럼 만나고 모이고 먹고 마시고 떠들고 노래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시간은 시계 바늘의 움직임, 달력 숫자에 얽매이지 않는다. 거꾸로 도는 시계도 있고 1~31의 숫자를 뒤죽박죽 섞어놓은 달력도 있지만 시간이라는 운명의 흐름을 훼방 놓지는 못한다. 오히려 그 뒤틂의 유희를 통해 우리는 스스로 정해둔 흐름, 크고 작은 시간의 매듭들을 불편해 하며 인식하게 된다. 그렇거나 말거나 시간은, 고대 마야인들이 지녔던 미래의 상상력 혹은 달력 기록에 필요했을 수고의 한계를 넘어 지금 이순간에도 흔들림 없이 흐르고 있다.

시간이 일상의 질서를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개의 질서는 시간의 질서 위에서만 간신히 정돈된다. 그러므로 시간의 매듭은 일상의 매듭이다. 이맘때 우리는 성가셨던 일들을 하나 둘 마무리하고, 오래 절박하게 매달려왔지만 어쩔 수 없던 것들을 또 그렇게 수긍하면서 각자가 감당해야 할 것들을 속으로 품어 안는다. 그럼으로써, 인식하진 못하더라도, 모두 저 시간의 순행 위에서 다가올 매듭들을 예비하는 우주적 존재로서, 순행하는 시간과 아주 가까이 다가서게 된다. 그럼으로써 잠깐이나마 순해진다. 그 원초적 시간 안에서 우리는 우주적 시야를 지닌 한 점 티끌로 서서 저무는 해를 바라보고 또 떠오를 해를 기다리는 것이다.

1년이라는 시간의 한 매듭이 맺히고 시작되는 순간, 시선 안에 해를 붙들어두려는 욕망은 아이가 잠에서 덜 깬 눈 비비며 거실 벽 귀퉁이에 그려둔 줄자 위에 제 몸을 대봄으로써 밤새 자랐을지 모를 키를 확인하려는 욕망과도 별로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대견하고, 또 한편 안쓰러운 조바심.

우리가 해를 보내고 맞이하기 위해 찾아가는 곳은 주로 바닷가나 산마루처럼 시야가 탁 트인 공간이다. 풍경을 체험하는 인간의 시야각은 60도 정도 되고, 시선이 머무는 범위는 팔을 쭉 뻗었을 때 보이는 손바닥 정도의 면적 비율이라고 한다. 붙박인 홑눈을 지닌 인간에게 시야각과 시선 범위를 넘어서는 파노라마의 풍경은 생물학적 한계를 넘어서는, 온전히 감당할 수 없는 자극이다. 그 광활한 풍경 앞에 설 때 인간은 기억과 이성의 도움으로, 마치 사진을 파노라마로 이어 붙이듯, 시야 귀퉁이의 선과 색조를 대조해가며 편집해보지만 완벽한 그림으로서의 대상을 얻지는 못한다.

그 한계의 고통에 고대의 미학자들이 붙인 이름이 숭고미인 듯하다. 논리나 이성 감각과 상상을 넘어서는 측정 불가능한 절대공간, 전율과도 같은 그 고통스러운 자극 앞에서 인간이 느끼게 되는 극도의 황홀경과 초월적 아름다움. (안성찬 저)이란 책에는 숭고미의 개념사적 기원이 고대 희랍어 'hypsos'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쓰여 있다. '높이' '높음'이라는 원 뜻을 지닌 저 단어는 이후 전의 확산되면서 '격정적으로 솟아오르는 영혼의 고양'을 지칭하는 용어가 됐고, 고대의 그리스인들은 연극 등을 통해 근심 걱정거리 천지인 일상사를 벗어나 영원한 신들의 높이에서 인간과 국가의 운명을 바라보는 희열(카타르시스)을 일컬을 때 숭고라 했다는 것이다. 숭고의 저 형상화는 떠오르는 태양의 이미지와 꼭 닮아 있다. 절대의 숭고 공간을 가로지르며 저무는, 혹은 솟아오르는 해의 운행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이중의 숭고미를 체험한다.

하지만 우리가 한 해의 마지막 여가를 덜어 고된 여행길 불문하고 일몰의 명소를, 혹은 새벽같이 일어나 그 추위를 무릅쓰면서 일출이 장관이라는 동해안 바닷가나 높은 산을 찾을 때 염두에 두는 것들은 습관적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현실적이다. 마음의 앙금을 씻고,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는 것. 지는 해의 연짓빛 노을로 맑게 씻어낸 마음 안에 남겨진 크고 작은 바람들을 떠오르는 해의 기운 위에 담아 올리는 것. 그 내밀한 읊조림은 자신을 향한 약속이자 절대자를 향한 소박한 기복의 언어가 된다. 또 몸을 돌려 나란히 선 이들과 눈을 맞추며 주고받는 위로와 격? 희망의 덕담들은 그 약속과 기도의 아름다운 여운일 것이다.

해맞이 풍습의 유래를 고대인의 태양숭배 의식에서 확인하려는 것은, 그래서 자연스럽다. 해를 맞이하는 공간에서 우리는 돌탑 위에 정갈한 돌 하나를 골라 얹거나 물가에 촛불을 켜놓고 비손하는 것과는 다른, 해와 달, 나아가 하늘의 뭇 별들과 동조(同調)하며 살았던 토템부족으로서의 집단 유전자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거기에는 인간이 신(이라는 관념)을 만나기 훨씬 전부터 지녔음직한 본능적 끌림, 신앙의 자리보다 더 깊은 곳에 남아있을 절대적 밝음의 존재에 대한 공포와 의존의 충동도 있을 것이다.

해넘이를 즐기는 양태는 대체로 차분하고 개인적이다. 그것은 해넘이가 멀어져 가는 아름다움, 열정의 긴 여운과 함께 어둠으로 잦아드는 형식인 까닭과 상관이 있을지 모른다. 진한 감동의 마지막 책장을 덮듯 그렇게 묵묵히 오래 머물며 "진정한 책은 대낮이나 요설의 산물이 아니라 어둠과 침묵의 산물일 것"이라던 소설 속 어떤 문장이라도 나지막하게 읊조려 보며, 지난 시간들을 보내고 또 힘겹게 긍정하는 것이다.

반면에 해맞이 정경은 활기차고 공동체적이다. 긴, 초조한 기다림 끝에 터지듯 번져오는 순한 빛. 겸재 정선의 '목멱조돈(木覓朝暾)'이 보여주듯 푸른 빛 도는 먼 산의 먹빛 능선을 타고, 붉고 밝은 빛 무리로 애를 태우던 해가 뚜렷한 원호를 그리며 삐죽 제 모습을 드러내는 광경은 그 자체로 자못 극적이다. 추위를 참으며 모여 섰던 이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폭죽과도 같은 함성을 힘차게 내지르게 된다. 그 때의 함성은 재생과 부활과 새로운 광명에 대한 환희의 예찬일 것이다.

해넘이나 해맞이의 명소에는 더러, 행하는 이들의 수고로움만큼 누리는 이의 입장에서는 썩 달갑지는 않을 수도 있는 떠들썩한 공연이 펼쳐지는 곳도 있다. 그 역시 해를 만나는 일이 개별적 신성(神性)의 의미와 함께 공동체적 결속의 잔치라는 의미도 내재돼 있음을 말해준다.

또 거기서 내가 지닌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있을 만큼 고마운 따뜻한 차를 준비했다가 나눠주는 이들을 만날 때도 있다. 그 추위에 떨며 마시는 한 잔의 차는 우리가 한 해 내내 얻어왔고 또 얻게 될 이름 모를 이웃의 마지막 그리고 첫 나눔의 의례가 된다. 어쨌건 그 요란하고 호들갑스러운 집단 행위도 시간 너머(달력 너머)의 우주적 관점, 신의 관점에서 보자면 키재기하는 아이들처럼, 한편 대견하고 또 한편 우스꽝스러워 보일지 모른다.

선임기자 proos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